[기자수첩] 서민음식, 서민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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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서민음식, 서민금융
  • 김경렬 기자
  • 승인 2023.01.0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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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렬 매일일보 금융증권부 기자.
김경렬 매일일보 금융증권부 기자.

[매일일보 김경렬 기자] “이게 서민음식이군요” 몇 년 전 선거철 한 후보자가 재래시장을 찾아 떡볶이를 먹으며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많은 사람들이 공분했다. 한참 떠들썩했다. 그 뒤로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먹을 때마다 생각났다. 이게 ‘서민음식’이구나 했다. 그땐 ‘서민’의 정확한 뜻을 몰랐다.

‘서민’의 사전적 정의는 두 가지다. 하나는 ‘아무 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일반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제적으로 중류 이하의 넉넉지 못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한자 뜻은 ‘여러 사람’, 영어로 번역하면 ‘the common people(보통 사람)’이다. 사전적 정의로만 따지면, 나는 서민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러 연유로 찝찝하다. 누군가 ‘서민’이라고 명명하고 나니 왠지 구획이 나뉜 것만 같다. 음식의 품격도 달라진 듯하다. 이상하다. 떡볶이 먹는 사람이 신분적 특권을 가진 사람이나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봉건사회에나 있을 법한 계급의 개념을 뿌리 뽑자는 지식인들의 합의 결과를 학습해왔다. 헌법에서도 국민은 이 나라의 주인이고 국회의원, 대통령은 선출직으로 헌신해야한다는 개념을 적시해뒀다.

가방 끈이 무색하게 요즘 들어 서민이라는 표현에 익숙하다. 특히 금융당국에서 코로나19 피해자를 돕는다는 취지의 지원책을 ‘서민금융’이라고 표현한다. 되레 ‘서민’으로 평가받아 지원 대상에 포함되면 쾌재를 부르는 사람도 늘었다.

‘서민’은 은행에서 현대판 하층민으로 전락한다. 한 시중은행 어플의 개인 신용대출 카테고리를 살펴보면 직장인, 전문직, 서민금융(정책지원), 일반/기타 등이다. 일단 서민을 제쳐놓고 어디를 눌러야하나 고민한다. 딱 떨어지진 않지만 유력한 분류는 ‘직장인’이다. 클릭해보면 신용대출 종류에 따라 한도가 다르다. 공무원은 2억원, 씨티 갈아타기 대출 2억2000만원 등이 눈에 띈다.

괜히 전문직을 클릭했다가 자존심이 무너진다. 페이닥터, 개업의, 판사, 검사, 변호사, 수의사, 수의학과 학생 등이 전문직 대상이다. 특이하게 간호사는 없다. 최대한도는 페이닥터, 개업의가 3억원으로 가장 높다. 이래서 부모님이 콕 집어 판사, 검사, 의사 하라고 말씀하셨나보다.

인도의 간디가 된 것처럼 카스트 제도의 향기를 느낀다. 혹시 나만 그런가해서 주변인에게 물어봤더니 “이제보니 그렇네”라며 놀랐다.

냄새의 원인은 ‘돈’이다. 서민이라는 단어가 금전 역량이 떨어진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이 됐다. 이제는 명함이 아니라 집문서를 들고 다니면서 위아래를 판단해야 할까보다.

1900여년 전 위나라의 군략가 ‘사마의’는 말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10배 잘나면 그를 헐뜯고, 100배 잘나면 두려워하고, 1000배 잘나면 고용당하고, 10000배 잘나면 그의 노예가 된다고 했다. 기준이 돈이라면 명언은 실언이 된다. ‘서민’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돈 많으면 헐뜯는다. 돈이 1000배 많은 회사에 고용된다. 돈이 10000배 많은 대기업 총수의 노예가 된다.

다만 서민은 돈 많은 사람에게 관심조차 없는 마음의 부자이거나 오늘 하루가 힘든 보통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유독 추웠던 이번 겨울 서울역사 귀퉁이에 박스로 집을 짓고 누워있는 아저씨는 누군가의 노예가 아니다. 아저씨는 지나가는 사람이 누구든지 관심도 없다. ‘서민금융’이라고 적힌 전단지를 샅샅이 뒤지며 지원 대상에 포함되려 처절한 누군가보다 어떨 땐 자유로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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