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칼럼] 언제나 둥근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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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칼럼] 언제나 둥근 달
  • 최성욱 기자
  • 승인 2021.05.26 1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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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소식 군산교회 담임 목사 김진곤
기쁜 소식 군산교회 담임 목사 김진곤<br>
기쁜 소식 군산교회 담임 목사 김진곤

[매일일보] 태양은 변하지 않는다. 늘 둥글다. 그러나 달은 그믐달로 시작해서 반달, 둥근달... 태양은 변하지 않는데 달은 왜 변하는가?

성경 속의 물질적 세계는 모두 우리 마음의 세계를 표현한다.

태양은 신랑을, 달은 신부를.. 신랑은 예수님을, 신부는 교회를 의미한다. 마치 달이 매일 매일 그 모양이 변하듯이 신부된 우리는 늘 그 마음이 흔들리고 변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변하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다. 예수님이 변하면 큰일 난다. 예수님이 변하고 흔들리면 누가 예수를 믿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매일매일 변한다.

우리는 달을 볼 때마다 말한다. 보름달이다 반달이다. 그러나 실제의 달은 변하지 않는다. 태양 빛이 비춰지는 양 만큼, 모양이 달라져 보일 뿐이지 실제의 달은 똑같다.

초승달은 손톱처럼 작아 보이고 보름달은 이상하게 크 보인다. 그믐달은 잠시 뒤에 사라지기에 아쉽고 슬프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일 뿐.. 실제의 달은 초승달 이던 반달이든 보름달이든 똑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 여러 가지 모양을 가진다. 어떤 때는 내가 반달처럼 반반 신앙을 한다. 어떤 때는 주님을 바라보지만 어떤 때는 형편에 이끌린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그믐달처럼 거의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 상태로는 내가 더 이상 신앙을 할 수 없을 것 같애... 아 신앙이 너무 힘들어... 그렇게 하다가 어떤 때는 주님의 마음을 발견하고 충만한 마음으로 산다.

그때 내가 왜 시험 들었지? 주님이 이토록 나와 함께하시는데..!! 앞으론 시험들 일이 없을거야... 그렇게 기뻐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또 시험이 든다. 우리는 그렇게 좋았다가 나빠질 수 있다. 밝았다가 어두워질 수 있다.

그러나 반 달이라고 해도 그것은 반 달이 아니다. 그믐 달 이라해도 사실은 그믐 달이 아니다. 우리가 볼 때 그렇지 실제의 달은 둥글다. 빛이 비춰지는 부분만 그렇게 보인다. 그 부분만 보면 우리가 늘 일정치 못하고 변화가 무상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부분은 안 보여서 그렇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부분이다. 신앙을 하면서 때로는 내가 죄를 지으니까 죄인인 것 같고 악한 모습이 나오니까 악인인 것처럼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내가 볼 때 그런 것이고 실제의 모습은 온전한 것이다. 마치 달이 반 달이지만 실제는 온달이듯이, 그믐 달이지만 실제는 여전히 온 달인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마시는 물 속엔 깨끗한 물이라고 해도 1cc에 세균이 100마리 이상이 있다고 한다. 더러운 물이면 천 마리, 만 마리도 넘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런 물을 마신다고 병에 걸리는가? 그런다고 병에 걸린다면 살아 남을 사람 아무도 없다. 우리가 그 물을 먹고 안 죽었다고 세균을 안 마신 것은 아니다. 매일 매일 마시는 양의 물을 생각하면 엄청난 양의 세균을 마신다. 그러나 우리가 마시는 그 많은 세균들을 우리 몸속의 백혈구 즉, 흰 핏돌이 균을 잡아 먹고 건강을 유지하게 해 준다.

내가 죄를 짓는 능력이 100이라고 할 때 내 죄를 씻는 주님의 능력은 만 이상이다. 나는 매일 매일 죄를 짓지만 주님은 내가 죄를 지은 것 보다도 더 깊고 넓게 죄를 씻어 놓으셨다. 건강한 사람의 몸 속에 세균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백혈구가 왕성하게 활동을 해 주기 때문인 것처럼 신앙을 밝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의 실수와 허물보다 그것을 씻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능력이 훨씬 큰 것 을 믿기 때문에 참된 자유를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시편51편에는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바세바를 범했을 때 어두움 속에 있다가 선지자 나단의 책망을 받고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는 모습이 나온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51:7)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51:12)라고 기도했다.

다윗은 비록 죄를 범했지만 죄 속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해 달라고 했다. 그러면 내가 정해질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 우슬초는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데, 다윗 당시에는 아직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기에 다윗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고 믿음으로 말한 것이다.

또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 시켜 달라고 했다. 구원을 해 달라가 아니라 즐거움을 회복해 달라는 것이다. 다윗은 비록 범죄를 했지만 그의 구원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어두워짐을 통한 즐거움이 상실된 것을 회복시켜달라는 뜻인 것이다.

오늘날 참 많은 믿는자 들의 마음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죄를 지을 때 마다 신분 자체가 달라진다. 어떤 때는 죄인, 어떤 때는 의인... 행위에 따라 달라 지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죄를 범해도 신분은 늘 의인의 위치에 있었다.

다만 마음의 관계, 기쁨의 회복을 두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한 것이다. 그것이 정확한 믿음 위에 있는 신앙인인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도 더 이상 나의 행위에 좌우 되기 보다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의 희생에 착념이 되어서 언제나 밝고 복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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