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낯 뜨거운 명예 핑계로 열려버린 판도라의 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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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낯 뜨거운 명예 핑계로 열려버린 판도라의 상자
  • 고수정 기자
  • 승인 2013.07.04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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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수정 정치부 기자
[매일일보 고수정 기자] 지난 3일 여야가 ‘2007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제출 요구서를 국가기록원에 송부시킴에 따라 다음 주 안에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정치권은 기록물 열람 후 그 내용을 일반에 공개하기 위해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을 이용할지 등 사후처리를 놓고도 고민 중이다. 대통령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열람내용을 누설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7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 진위공방에도 불구하고 공개 가능성이 높지 않은 것으로 점쳐졌던 대화록이 결국 공개되는 것은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전문과 발췌록을 ‘불법 배포’한 것이 결정적 발단이다.

전임 원장이 국정원을 ‘국가홍보원’처럼 운영하다 법의 심판을 받게 된 상황에서 남재준 원장마저 ‘불법 배포’로 사법처리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남 원장은 대화록 공개에 대해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고 직원의 사기와 국가 안위를 위해”라고 말했지만 수긍하기 어렵다.

국정원은 국가 기밀을 만들고 지키는 것이 존립의 이유인데 국가기밀을 굳이 공개하면서 스스로 명예를 훼손했을 뿐 아니라 국민으로 하여금 존립 근거까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대화록과 함께 공개된 발췌본을 들여다보면 남 원장이 말하는 ‘국정원의 명예’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납득하기 더 어려워진다. 발췌본은 없는 말은 더하고 있는 말은 빼고 의미는 비틀어서 하나의 새로운 ‘창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을 “나”라고 호칭했는데도 이들이 만든 발췌본에는 “저”로 돼있고 노 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이라고 말한 부분에도 ‘님’자를 붙여 넣어 “김정일 위원장님”이라고 바꿔놨다. 국정원은 “단순한 오타”라고 해명했지만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다.

정치권과 국민을 혼란 속에 빠뜨린 부분은 서해 북방한계선(NLL) 관련 발언이다. 발췌본은 서해평화협력지대 설치 구상 등 NLL 긴장완화 방안의 앞뒤 문맥은 다 잘라버리고 “NLL은 국제법적 논리적 근거가 분명치 않고” 등의 자극적인 발언만 부각시켰다.

국가 기밀을 이용해 소설을 만든 셈인데, 국정원이 애초부터 ‘NLL 포기 논란’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발췌본을 만들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음지에서 일해야 하는 국정원이 요즘은 너무 양지로 나와 버렸다. 그래서인지 정치권 일각에서는 ‘국정원 해체’를 주장하는 목소리마저 나오고 있다. 박근혜정부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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