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병이라는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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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병이라는 관계
  • 매일일보
  • 승인 2020.11.10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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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농업과학원 농업생명자원부 유전자공학과 농업연구사 안일평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생명자원부 유전자공학과 농업연구사 안일평

[매일일보] 병은 병원체가 공격 대상인 숙주와 벌이는 기생 상황이다. 대부분의 경우 병원체와 숙주 모두 장구한 세월을 거치며 서로가 서로의 전략을 빤히 알고 있는 상황이다. 

그림 하나 혹은 한 상황을 생각해보자. 한 마을에서 태어나 산과 들을 헤매던 코흘리개 어릴 때부터 같은 마을에서 비슷한 농사를 짓고 비슷한 나이에 결혼해 자식을 낳아 집안을 이루고 땅을 일구어 온 할아버지 두 분이 바둑을 둔다. 아니면 역시 같은 동네에서 태어나 직장 생활을 하며 한 마을에서 살아온 할아버지 두 분도 될 수 있다. 

이들은 서로 마음속까지 들여다본다. 사돈의 팔촌까지, 말 그대로 집안의 숟가락 젓가락이 몇 개인지도 다 안다. 바둑은 이들이 슬쩍 나이들면서 생업에서 한 발을 둔 후 무료할 때 같이한 오락이며 수천번을 같이해 온 수담이다. 처음은 어떻게 두는지, 패를 잡을 때 혹은 잡고 나서 집을 남기는지, 상황이 불리할 때 어떤 식으로 대처하는지가 서로에게 입력되어 있다. 

처음에는 어느 한 쪽이 압도적으로 계속 이겼을 수도 있고 세월이 흐르며 반대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바둑을 계속 둔다는 것은 서로가 일진일퇴를 반복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어느 한 쪽이 바둑에 압도적일 경우 이들 간에서 바둑은 소일거리가 되지 않으며 다른 오락을 찾으려 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상대에 대한 정보들을 모두 바둑에 반영시킨다.

병도 이와 비숫하다. 병원체와 숙주는 바둑 두는 친구들이 그렇듯 오랜 기간을 거쳐 양 쪽은 서로의 집은 부수고 자신의 집은 늘리려 해 왔다.

세상이 처음 생기고 원시 미생물이 생겼을 때 이들은 그저 주변 환경에서 양분을 흡수하며 살았다. 세월이 흐르며 적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양분은 빠르게 줄었다. 자신과 비슷하게 양분을 흡수하는 미생물 밀도가 높아져 양분 소모는 늘어나는데 공급이 소비를 따르지 못했다. 

생존 경쟁으로 인한 선택 압력 증가는 미생물이 가진 유전자의 변화와 미생물 자체의 진화를 요구했고 적절한 변화를 보이지 못한 군락은 계속 사라진다. 

어떤 집단은 용암과 닿아 뜨거운 원시 바다에서 다량으로 분출되는 이산화황의 수소와 이산화탄소를 이용해 유기물, 즉 영양분을 직접 합성했다. 이 집단은 나중에 이산화황 대신 비슷한 구조와 수소를 가졌으나 초기에 비해 훨씬 많아진 산소로 인해 주변에 흔해진 물 분자를 이용했으며 그 분포가 한정된 뜨거운 물보다 8광분 가량 떨어진 곳에서 지표면 어디에나 다량으로 쏟아지는 햇빌을 축적시켜 산소를 배출하며 포도당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를 위해 이 집단은 포도당을 합성하는 집단과 포도당을 에너지로 바꾸는 집단을 문자 그대로 '몸속으로' 받아들인다. 광합성 세균이 탄생이다. 

다른 집단은 얼핏 보기에는 더 쉬운 방법을 택했는데 다른 미생물이 생산했거나 가지고 있는 영양분을 빼앗는 것이다. 빼앗고자 하는 쪽이나 자신을 방어하려는 쪽 모두 처음에는 변변한 공격과 방어의 수단이 없었기에 숫자와 크기로 밀어붙이는 원시적인 육탄전이 벌어진다. 

약탈자와 방어자는 공격과 수비를 반복하며 서로의 방법을 알아내 적응하기 시작하고 적응하지 못한 집단은 통째로 사라진다. 약탈이나 방어에 성공한 집단들은 공격 수단과 방어 수단들, 그리고 이 무기들의 활용 방법과 순서를 유전체에 새겨 후대에 남겼다. 초기의 막 되먹은 육박전은 이윽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필수 유전자(생존하는 데에 필요한 유전자로서 유기물 덩어리의 분해와 자신이 필요한 분자 합성, 주변 환경 적응에 필요함)들의 생산물을 이용하는 수준까지 상승한다. 

사람으로 치면 석기 시대 주먹 도끼나 끝을 달군 나무 막대기, 후일의 식칼, 삽, 괭이 정도가 공격 도구고 방어구로는 솥뚜껑이나 나무판자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런 무기들은 오랜 기간 쓰여왔으며 저렴한 비용과 효율성으로 인해 지금도 꾸준히 쓰인다.

이미 공격하는 쪽이나 방어하는 쪽 모두 상대방의 수를 읽고 있는 상황까지 진전되며 일부 미생물들은 다세포 생명체로 진화한다. 집단이 한 개체로 변화한 뒤 각 세포 간의 업무 분장과 기관 분화가 일어나고 광합성을 하는 다세포 생명체는 식물로, 식물이나 다른 포식자를 먹어서 약탈하는 쪽은 동물로, 그리고 이들의 사체나 찌꺼기 등의 부스러기를 이용하는 곰팡이 등이 거의 모든 생태계를 점유한다. 지금도 거의 모든 생명의 유전체에는 이 과정이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분화하며 기관을 형성하는 가장 효율적이라는 방법이라는 것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종자나 수정란, 포자로부터 성장할 때 세포 수의 증가와 더불어 기관 분화를 반복한다. 

다세포 생물의 세포 숫자와 전문화된 기능, 풍부해진 유전체 역량은 훨씬 복잡하고 많은 유전 정보와 에너지 비용이 많이 드는 고가의 무기들을 생산하는 기반이었다. 약탈하려는 병원체 입장에서는 침입 초기에 여러가지 독소나 효소, 단백질을 생산해서 방어하려는 쪽의 세포를 무너뜨리거나 공격자의 침입을 감지하는 원시적인 감지 수단을 파괴시킨다. 값이 비싸더라도 식칼이나 장대를 들고 맨 몸으로 공략하는 것보다는 훨씬 효율적이기에 이들은 금방 동족들 간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며 자신의 유전체를 퍼뜨릴 기회 또한 증가한다. 

전체 집단의 천이가 일어나고 결국 대다수의 공격자 집단이 신무기를 생산하는 유전체를 가진 쪽으로 변화한다. 공격자의 공격 수단이 변화하여 개체 수가 증가할수록 방어자들은 더 혹독한 선발 압력에 시달린다. 방어자들은 교배를 통해 외부 유전자들을 도입하기도 하고 자신의 유전자들 중 방어에 효과가 있었던 유전자의 숫자를 늘리기도 한다. 

무수한 부적절한 변이들이 사라지며 조금이라도 다른 개체보다 유리하게 변화한 개체가 살아남는다. 일단 어떤 방향의 변화가 더 효율적이라는 방향이 설정되면 그 방향으로 유전체 변화가 집중되며 그 다음은 반복되는 패배와 그 때마다의 인해 전술을 거쳐서 마침내 높은 수준으로 공격자의 무기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개체가 나타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수준에서도 교착상태에 빠지면 마침내 병원체는 더 많은 유전체 영역과 대사 에너지를 투입하여 식물의 견고한 방어를 기만하고 무력화시키는 단백질을 만든다. 학술적으로는 '비병원성 유전자 산물'이라 부른다. 

한 가지 문제점은 이 특수하고 비싼 무기들이 숙주의 방어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공격 목표 또한 대단히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병원체가 다른 종류의 숙주를 공격할 때에는 쓸모도 없고 비용이 들어가니 생산하지도 않는다. 괜히 유전체 자리만 차지하는 것이다. 

반면 필수 유전자 산물들은 원래 기능이 있는 생활 유전자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세균 종간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많고 범용성이 높아서 병원체가 여러 종의 숙주를 공격하더라도 초기에는 모두 필수 유전자 산물을 이용한다. 비용 대비 효과도 괜찮아서 환경 조건만 맞는다면 웬만한 식물은 모두 약탈할 수 있다. 하지만 숙주인 식물이 높은 수준의 방어 능력을 유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약탈하기 위해서는 비병원성 유전자 산물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식물은 병원체의 침입을 초반에 차단하기 위해 세포벽을 두껍게 만든다든지 병원체가 싫어하는 독성 물질을 표면에 집중되도록 생산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침입 받은 세포와 그 인근 세포들의 자살유전자를 켜 세포를 죽인다. 침입한 병원체는 죽은 식물 세포에서는 양분을 얻을 수 없으므로 이들의 침입은 초기에 차단된다. 옛날 수나라, 당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고구려 군이 중국군의 침입 경로에 있었던 모든 물자와 식수를 못 쓰게 만드는 청야 전술을 연상하면 된다. 

식물은 일부의 세포를 희생하는 대가로 더 큰 피해 확산을 차단한다. 특히 세포 자살은 식물 자신으로서도 제어가 되지 않으면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기에 침입한 병원체에 대한 정확한 정보 수집과 올바른 정보 전파, 신속한 전체적 방어 체계 활성화가 필요하다.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식물은 특정 목표를 감지하는 데에 특화한 레이더와 네트워킹 시스템을 연상시키는 무기들을 생산하는데 이것이 저항성 유전자 산물이다. 

이 유전자의 유무에 따라 방어 체계가 말단까지 전달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의 차이는 60시간 이상이다. 병원체가 침입한 상태에서 16시간 이내에 초기 침입 경로를 차단하고 방어태세를 완료한 식물과 72시간이 지나서 침입 부위에 병원체가 교두보를 마련한 다음에서야 침입을 감지한 식물의 방어 태세는 차이가 매우 크며 저항성 유전자 산물이 병원체의 침입을 감지하고 18시간 내에 침입 지역을 폭파시키는 순간 대부분의 방어 작전은 차질 없이 종료된다.

그렇다면 결국 식물의 승리와 병원체의 패배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 그럴 수는 없다. 장기와 바둑을 생각해보자. 상대방 대마를 쫓아다니다가 자신의 세력이 모두 무너지면 바둑은 어떻게 될까? 목표했던 상을 잡았는데 반대로 궁이 외통수를 당한다면? 바둑과 장기는 많은 집을 짓거나 상대방 궁을 잡으면 이긴다. 

식물과 병원체가 이기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상대방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지상목표는 생존이다. 리처드 도킨스 식으로 말하면 유전체 보전과 증식이다. 이 지상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식물이든 병원체든 체력, 대사능력 증진과 생식을 통한 후대 생산이며 이를 위해서는 쓸 수 있는 에너지와 유전체 영역을 가능한 한 많이 이 분야에 투입해야 한다. 

식물은 병 방어에, 그리고 병원체는 식물을 침입하기 위해 유전체 영역의 8%에서 20%를 투자한다. 병원체가 생산하는 무기는 유지와 운용에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 식물의 병원체 감지 체계 또한 엄청난 유전체 영역을 요구하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방어 태세를 유지하는 데에 매우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저항성 유전자 산물이 자살 스위치를 켜고 경계 신호를 전체에 송신하면 꺼져 있던 병 방어에 관련된 유전자들은 단시간 내에 거의 대부분 켜지면서 병 방어 물질과 효소, 신호전달 단백질들을 마구 생산한다. 

고가의 방어 무기들을 일단 찍어내고 보는 것이며 엄청난 비용이 병 방어에 투입된다. 병원체는 자신의 공격 시간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으므로 필요한 무기만 생산하면 되지만 식물은 신호가 돌면 대사 에너지를 가능한 한 모두 방어체계 운용으로 투입하여 모든 침입이 가능한 지역을 방비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면 병 방어에 성공하더라도 식물은 생존과 생식에 필요한 에너지가 부족해져서 큰 곤란을 겪는다. 병 방어 유전자를 많이 가지고 있는 품종들은 그렇지 않은 품종보다 작물 특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경작지에 다종다양한 병이 들끓지 않는 한 이런 비싼 방어무기들은 쓸모도 없이 유전체 영역과 에너지만 낭비한다.

당연히 사람이 좋아하는 농업적 특질인 생산량, 미질, 빛깔, 향기, 결정적으로 맛을 증진시키는 데에 쓸 수 있는 여유는 줄어든다. 실험 식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저항성 품종에 병원체를 접종한 후 생산된 종자 무게는 접종하지 않은 식물보다 10%나 낮았다. 이는 한 번의 방어전을 펼치기 위해 식물들이 미래를 위한 세대 1할을 소모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우리가 관찰하는 병은 병원체와 숙주 쌍방이 모두 오랜 기간 세대를 거듭하며 서로에 대해 알만큼 아는 관계며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중이다. 만약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면 우리가 관찰하기도 전에 그 관계는 사라졌을 것이다. 서로가 좋기만 한 관계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은 정말 많은 바둑 두는 어르신들로 가득 차 있다.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생명자원부 유전자공학과 농업연구사 안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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