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한국정치, 기생충 메시지가 아닌 영광에만 주목했다
상태바
[기자수첩] 한국정치, 기생충 메시지가 아닌 영광에만 주목했다
  • 김나현 기자
  • 승인 2020.02.17 14: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매일일보 김나현 기자]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개봉한 후 한동안 “기생충 봤느냐”가 대화주제가 될 정도로 시끌벅적했던 기억이 난다. 저택 지하로 기나긴 계단을 내려가면 마주하는 숨겨진 공간, ‘냄새’, 폭우로 물에 잠긴 반지하와 젖지 않는 저택의 인디언 텐트 등 영화에는 형식미와 은유가 가득하다. 결국 기생충은 작품성을 인정받은 동시에 대중의 마음까지 사로잡으며 천만영화 대열에 합류했다.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이 영화는 지난 10일 새 역사를 기록했다. 프랑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데 이어 2020년 미국 ‘아카데미상 4관왕’을 거머쥔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각종 논평으로 찬사를 보냈다. 총선을 두 달 앞둔 시기인 만큼 여기서 그치지 않고 관련한 공약도 내놓았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수상 후인 13일 한국형 ‘엥떼르미땅’을 도입하는 방안을 포함한 문화 예술인 복지 향상 공약을 내걸었다.

자유한국당도 “기념비적인 사건”이라며 기생충을 극찬했다. 특히 한국당은 봉 감독의 고향이 대구라는 점을 활용한 ‘봉준호 마케팅’에도 열을 올렸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내놓은 공약을 들여다보면 과하다싶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대구에 ‘봉준호 영화관’을 만들겠다는 강효상 의원에 이어 다른 한국당 예비후보들은 봉준호 생가터 복원, 동상건립, 봉준호 영화의 거리, 기생충 조형물 설치, 명예의 전당 등 ‘패키지 공약’을 꺼내들며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봉 감독과 기생충의 주연배우 송강호씨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적이 있다는 점도 함정이다. 당시 여당이었던 한국당의 이러한 모습에 ‘자격 시비’가 불거지는 것도 당연한 결과다.

더 안타까운 점은 기생충의 쾌거에 주목하는 정치권이 정작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에 집중하는지 의문이란 것이다. 기자의 또래 중 반지하에 살아본 경험이 있는 지인은 취객이 집 앞에 노상방뇨를 하는 모습을 집안에서 보는 영화 속 장면에 “그때 나도 술을 마신 고등학생들이 집 창문 옆에 노상방뇨를 하는 걸 봤었다”며 “그때 1년 동안 살면서 너무 힘들었는데 지금은 나와서 좋다”고 했다.

이런 현실적 모습이 바로 영화가 품은 문제의식이었을 것이다. 영화 마지막에서 기우는 ‘내가 아버지를 위해 이 집을 살거야’라고 말한다. 봉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장면을 언급하며 “평균 월급을 받는 젊은이가 그 저택을 사려면 547년이 걸린다. 그래서 그 대사를 쓸 때 매우 착잡했다”고 했다. 봉 감독은 꼬리칸, 머리칸으로 이어지는 영화 설국열차에서도 꾸준한 메시지를 내놨다.

아무도 이 영화의 주제의식인 빈부격차, 양극화에 대해 책임 있는 말을 내놓지 않고 영혼 없는 ‘숟가락 얻기’ 마케팅만 펼친다. 기생충의 쾌거 후 정치권이 고민해야할 지점은 일회성 총선공약이 아닌 기생충이 다루는 불평등 문제를 풀어갈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