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재개발 조합원이 비리에 눈감는 심리적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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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재개발 조합원이 비리에 눈감는 심리적 이유
  • 성동규 기자
  • 승인 2019.09.03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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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성동규 기자]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 교수는 주류 경제학의 담론을 깨고 인간은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주창했다. 그는 수많은 사례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증명했다. 그중 하나를 보면 이렇다.

유럽 국가들을 대상으로 장기기증 서약을 한 사람들의 비율을 통계 낸 결과 스웨덴은 가장 높은 비율을 덴마크는 가장 낮은 비율을 기록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보통 문화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두 국가는 국경을 접하고 있어 비슷한 역사와 문화, 종교 사회구조로 되어 있다. 문화적으로 유사한 오스트리아와 독일도 장기기증에서는 양극단에 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 역시 마찬가지다.

합리적인 유추로는 설명이 잘되지 않는다. 해답은 놀라울 정도로 허무하다. 면허시험장의 신청양식에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장기기증 서약 비율이 낮은 나라의 면허시험장 신청양식은 “장기기증 프로그램에 참여하시려면 아래 박스에 체크하세요”였다. 

반대로 장기기증 서약 비율이 높은 나라의 면허시험장 신청양식은 “참여하지 않으려면 박스에 체크하세요”라고 쓰여있다. 이는 신청양식의 설계자가 타인의 선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댄 애리얼리 교수는 자신의 선택 중 많은 부분이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특히 그는 인간의 생각을 제한하는 객관식에서 보기를 조작하면 인간의 선택을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다고 봤다.

우리 피부에 와 닿는 곳에서 예를 들면 재개발·재건축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갈등으로 풀어낼 수 있다. 그동안 재개발·재건축 사업을 수주하는 과정에서 또는 추진되는 과정에서 시공사와 조합의 비리가 만연했다.

시공사와 조합이 버젓이 불법을 저지를 수 있었던 이유도 보기를 제한해서다. 이들은 “비리 문제 삼아서 결국 사업이 좌초되는 꼴을 볼래. 아니면 비리는 눈감아주고 사업을 빨리 진행해 경제적인 이득을 볼래”라는 두 가지의 보기만을 조합원들에게 던져놓고 여론을 선동한다.

이에 따라 대다수 조합원 생각은 비리를 알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도록 왜곡된다. 일부 조합원이 문제를 제기하려고 하면 다른 조합원이 나서 이를 제지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이미 많이 늦은 감이 있으나 지금이라도 보기를 바로 잡아야 한다.

“시공사와 조합이 비리 문제를 해결하고 진정으로 사과한 뒤 조합원을 위한 방향으로 사업을 이끌 수 있게 할래”라는 보기가 추가된다면 비리에 눈감는 조합원의 수와 표류하는 사업장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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