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쇄도하는 주문…압박에 짓눌린 은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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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쇄도하는 주문…압박에 짓눌린 은행들
  • 이광표 기자
  • 승인 2019.06.27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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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이광표 기자] 은행권이 정부와 금융당국의 잇따른 주문 릴레이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 주문자는 '자율'이라고 말하지만 수용하는 은행들은 '강제성'을 띈 압박으로 여기고 있다. 이미 일자리 창출 기여도를 공개하겠다며 채용을 늘리라는 무언의 압박을 시작했고, 소상공인의 카드 수수료를 덜어주겠다며 만든 제로페이를 민간 법인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필요한 재원을 출연하라는 주문까지 더해졌다.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우리·KEB하나·NH농협은행 등 시중 5대 은행은 올해 채용 규모를 최소 100명 이상 늘리는 방향을 내부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달 초 금융위원회가 ‘금융권의 직간접 일자리 창출 효과를 측정해 오는 8월 공개하겠다’고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됐다.

금융당국은 평가가 아닌 '단순한 측정'일 뿐이라고 확대해석을 경계했지만 시중은행들은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물론 은행권은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다. 이익은 곧 투자와 채용확대로 이어지는 게 맞는 이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호실적이 고용 확대로 당장 직결되는 건 부담스럽다는게 은행들의 입장이다. 5대 시중은행들은 이미 상반기 신입행원으로 1010명을 뽑았다. 지난해 같은기간보다 100명이 늘었지만, 고용 확대 압박은 계속된다. 

특히 최근 몇 년 새 디지털화 영향으로 비대면 거래가 대폭 늘면서 은행은 영업점 수와 인력 감소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디지털화에 부합한 직군을 다양화해 고용 확대 기조를 유지한다고 해도 속도조절이 필요하다는 게 은행권의 입장이다. 일각에선 무조건식으로 고용을 늘리라는 압박이 이번 정부의 일자리 창출 실패를 은행권에 떠넘기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당국이 은행들 스스로 고용을 늘리도록 낡은 규제 철폐 등 여건을 조성해주는 게 선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최근엔 제로페이 민간 법인 전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재원을 두고 은행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며 업계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실제 지난 며칠 사이 이미 각 은행들에게 재원 출연을 검토해달라는 공문들이 접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은행들은 정부가 처음부터 수익이 나지 않을 제로페이를 예산을 들여 만들어놓고 은행에 민간화 출연금을 떠넘기는 건 지나치다고 토로한다. 특히 은행 대부분이 자체적으로 카드사 등을 통해 제로페이와 비슷한 서비스를 내놓고 있는데, 제로페이가 활성화하면 계열사 이익이 줄어드는 구조다. 정부가 시장논리를 무시한 채 금융홀대론적 시각이 여전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소상공인 지원은  좋은 명분이고 이와 관련해 우리도 다양한 금융서비스로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대놓고 출연금 요구하는 것까진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거절하자니 정부 눈치가 보이고, 불이익 우려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한편 최근 들어 경제부처 수장들은 금융지주사나 시중은행 CEO들과 유례없는 릴레이 회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 24일에는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시중은행장들과 회동을 갖고 정부의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발표를 앞두고 금융권이 협조를 바라는 내용을 전달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과 윤석헌 금융감독원장도 금융권 수장들과 회동 정례화에 나섰다.
  
그러나 최근 가졌던 일련의 회동 속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경제가 활력을 되찾기 위해 금융권에서 일자리도 많이 만들고, 담보가 부족하더라도 성장력과 기술력을 보고 대출 지원을 더 신경써달라는 등 대부분 금융권의 희생이 요구되는 내용이 반복 중이다. 정부가 금융권과 스킨십을 강화하고 업계의 애로사항을 청취하는 자리였다는 후문은 좀처럼 들리질 않는다.

금융 현장에선 민간은행을 정부의 하청기업쯤으로 여긴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금융을 하나의 산업으로 보지 않고 다른 산업에 자금을 지원하는 통로로만 보는 게 아니냐는 지적을 정부도 이제는 곱씹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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