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냉혹한 4차 산업혁명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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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냉혹한 4차 산업혁명의 그늘
  • 이근형 기자
  • 승인 2018.12.13 07: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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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이근형 기자] 상선약수(上善若水).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다. 어릴 적 자주 가던 이발관에 걸린 액자 속에 멋드러지게 쓰여 있었다. 가장 착한 것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고 네이버 사전에 정리돼 있다. 물처럼 다투지 말고 세상에 이롭게 살라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오류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기독교와 함께 들어온 이분법적 사고인 선악(善惡)이 투영됐다는 주장이다. 노자가 살던 시대는 물론 기독교가 도래하기 이전에는 동양에는 '악'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반대의 개념인 선도 지금의 ‘착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세상을 둘로 나눠보는 서구의 사고가 수용된 결과다. 과거 선은 ‘좋다’라는 의미였다. 노자 도덕경의 상선약수도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가 더 정확한 풀이다.

물은 형체에 구애받지 않는다. 형체는 없지만 주변과 어울려 다양한 모습을 변한다. 벽을 만나면 돌아간다. 정해진 목적지는 아래다. 막을 수는 없다. 물의 방향을 멈추거나 돌릴 수 있지만 잠시다. 결국은 제 가고 싶은 곳으로 간다.

예전부터 물을 잘 다룬 이들이 세상을 지배했다.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를 연 우가 치수(治水)에 성공해 순으로부터 양위를 받았을 정도다.

물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를 의미하기도 한다. 장강의 앞물이 뒷물에 밀려가는 것은 세상의 이치다. 지금 거대한 물의 흐름에 직면해 있다. 4차 산업혁명이다.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인류의 삶은 달라졌다. 이제 4차 산업혁명이 기존 산업과 유통 시스템, 삶을 혁명적으로 바꿔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시스템과 충돌은 불가피하다. 혁명에는 변화가 붙고 희생도 따른다. 역사에 기록된 혁명의 과정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인류가 살아온 방식이다.

며칠 전 택시 운전기사의 안타까운 죽음도 변화가 끌고 온 비애다. 안타깝지만 이 희생으로도 물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잠시 지체시킬 수는 있지만 되돌릴 수는 없다. 산업혁명 초기 몰락한 수공업자를 중심으로 방직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기계화를 막지는 못했다. 마부가 사라지고, 버스 안내원이 종적을 감춘 것도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시간의 문제일 뿐 언젠가는 변화가 온다.

카풀보다 더 충격적인 공포가 밀려오고 있다. 자율주행이다. 구글의 자회사 웨이모는 지난 5일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자율주행 택시 상용서비스를 시작했다. 운전자 없는 자동차가 도로 위를 맘껏 달리는 시대가 더 가까이 왔다. 또 한번 인류의 직업에 큰 변화가 올 것이다.

카풀이든 자율주행이든 4차 산업혁명의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변화의 바람이 다가오고 있다. AI(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하면 많은 직업이 사라질 것이다. 사무직은 물론 은행창구 직원, 제조업 종사자, 번역사, 운전사, 의사, 변호사 등이 꼽히고 있다. 한 때 잘 나갔지만 이제는 아니다. 영원할 것으로 믿었던 직장이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이로 인한 충돌과 혼란도 적지 않게 발생할 수밖에 없다. 돌이킬 수는 없는 물의 흐름이다.

이런 혼란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출범한 조직이 4차산업혁명위원회다. 그런데 이 위원회가 제 역할을 하는 지 의문이다. 카풀을 둘러싼 논란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물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4차 산업혁명도 마찬가지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위원회가 제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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