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정 큐레이터의 #위드아트] 인생을 메모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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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정 큐레이터의 #위드아트] 인생을 메모하는 법
  • 송병형 기자
  • 승인 2018.11.15 14: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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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선_나란히 걷는 낮과 밤(18), watercolor on canvas, 112x145.5cm, 2018. 사진=더 트리니티

“점심시간까지 마감할께요.” 필자는 하루에도 수십 차례 ‘TO DO’ 체크리스트를 수정한다. 리스트에는 오전 중 마쳐야 할 일, 오늘 중 반드시 끝내야 할 일, 오늘 해야만 할 듯한 일, 미처 마무리하지 못하고 내일로 넘겨야 하는 일 등이 가득하다. 하루 일과를 마치는 순간 내일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추가된다.

매일 밤 숙면을 취하느냐는 이 리스트에 달려있다. ‘끝냈다’는 표시로 리스트에 온통 줄이 그어지면 그날 밤에는 두 다리를 뻗고 잠을 푹 자게 된다. 어떤 날에는 마음이 가벼워져서 한 잔 생각이 절로 나기도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일을 모두 마치지 못했을 때도 마음이 평온한 날이 있다. 해야 할 모든 일들이 리스트에 모두 기록됐을 때다. 기록이 됐다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안심이 될 수가 없다. 메모의 힘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매 순간을 메모할 수 있다면 어떨까. 한발 더 나아가 살아가며 느끼는 감정의 변화까지 모두 메모할 수 있다면? 여기서 예술의 힘이 발휘된다. 전현선 작가는 그림으로 자신의 삶과 감정까지 메모하는 법을 알아냈다.

작가는 다양한 이미지를 평면으로 끊임없이 나열하며 자신만의 질서와 서사를 잇는다. 작품 한 점을 함께 감상해보자. 푸른 숲으로 보이는 공간에 화면의 반절을 채울 만큼 커다란 복숭아가 덩그러니 떨어져 있다. 그 주변으로는 폭포와 베어진 통나무, 바다, 원뿔모양의 도형들과 무화과, 수첩 등의 사물들이 무심하게 배치되어 있다. 안과 밖이 서로 교차되어 비집어져 나오고 시공간이 뒤섞여 있다.

작가는 “현재의 판단들과 잠정적인 결론들은 순간적이고 번쩍여서 쉽게 잊혀진다. 흐르는 물 위에 지은 집처럼 불안해서 금세 떠내려가 버리고 만다. 그림 속에서는 그 모든 것이 잠시라도 정착할 수 있다. 이해된 것보다는 이해되지 않은 것들이 받아들여진다. 보류된 확신 또한 그림 속에 자리 잡을 수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에게 그리기라는 행위는 일종의 메모인 셈이다. 때때로 그의 작품에는 포스트잇이 묘사되기도 한다.

작가는 수채화 물감과 아크릴 미디엄을 혼합하여 캔버스 위에 페인팅한 후 바니쉬로 마무리한다. 캔버스에 아크릴이나 오일이 아닌 수채화 물감을 사용해서 표현해낸 고유의 터치감은 젊은 나이에도 작가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최근에는 인물과 풍경적 요소가 생략된 채 기본적인 도형의 형태로만 남겨지는 새로운 변주를 보여주기도 한다. 대부분의 서사적 요소가 생략되고, 이미 전현선이 즐겨 쓰던 화면 속에서 회자되어진 도형이 중심이 되는 연작이다.

아트에이전시 더 트리니티 박소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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