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금관가야 추정왕궁지 ‘김해 봉황동 유적’ 발굴 결과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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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금관가야 추정왕궁지 ‘김해 봉황동 유적’ 발굴 결과 공개
  • 김종혁 기자
  • 승인 2017.11.21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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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대형 건물지군·의례용 유물 다수 발견 ,현장설명회 11.22. 오후 2시
2017년도 김해 봉황동 유적 조사구역 전경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금관가야 추정왕궁지로 알려진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 312일대 ‘김해 봉황동 유적(사적 제2호)’에 대한 최신 발굴조사 성과를 22일 오후 2시에 발굴현장에서 공개한다.

김해 봉황동 유적과 주변 일대에서는 지금까지 70여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주거지, 고상건물지(기둥을 세워 높여 지은 건물 터), 토성, 접안시설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됐다. 

김해지역 출토 기마인물형토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기존의 조사 성과와 김해군읍지(金海郡邑誌)의 수로왕궁터 기록을 근거로, 금관가야 중심세력의 실체를 찾고, 그 실증적 자료 확보를 위해 2015년부터 매년 김해 봉황동 유적 내의 추정왕궁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해오고 있다.

올해 3월부터 시행한 2017년도 발굴조사에서는 그동안 파악하지 못했던 봉황동 유적(동쪽 지점)의 전체적인 층위 양상을 확인했고,  가야 시기 대형 건물지군의 존재를 확인했다. 

또한, 화로형토기, 통형기대(筒形器臺, 긴 원통을 세워둔 모양의 그릇받침), 각배(角杯, 뿔 모양 잔), 토우 등 의례용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을 다수 발견했다.

층위 조사에서는 현재 지표면으로부터 4.5m 아래에서 기반층을 확인했다. 문화층은 원삼국 시대 민무늬토기가 출토된 문화층, 가야 시기의 건물지와 소성유구(燒成遺構, 불을 사용한 흔적이 있는 시설물) 등이 중복된 문화층, 이후 통일신라 시기와 조선 시대까지의 문화층이 확인됐다. 

가야 시기 문화층 조사에서는 다수의 대형 건물지가 발견됐다. 건물지들은 대체로 지름 10m 이상으로, 일정 구역 내에 밀집된 양상을 보인다. 대표적인 건물지는 3호 건물지인데 바닥은 타원형이며 이 일대에서 가장 크고 기둥자리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벽주건물지이다. 

김해 대성동 3호분 주곽 출토 화로형기대

유물로는 의례용으로 추정되는 유물인 화로형토기, 통형기대, 각배, 토우 등이 다수 발견됐다. 화로형토기는 금관가야를 대표하는 김해 대성동고분군의 수장급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한 모양이다. 

통형기대는 막대기 모양의 띠(봉상, 棒狀)가 부착되어 있고, 띠 전면에 일렬로 찍혀 있는 둥근 고리무늬(원권문, 圓圈文)와 몸체에 둘러진 물결무늬, 엇갈리게 뚫은 사각형 구멍(투창, 透窓) 등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은 독특한 형태이다. 통형기대는 가야의 수장급 고분에서 주로 확인되는 유물로, 생활유적에서는 발견된 사례가 없다. 이 유물들은 전년도 발굴조사에 출토된 차륜형(車輪形, 수레 바퀴 모양)토기, 구슬‧곡옥 등의 장신구류와 함께, 봉황동 유적을 점유하고 있었던 유력 집단의 존재를 시사하고 있다.

이번 김해 봉황동 유적의 추정왕궁지 발굴조사에서는 당시 유력 계층의 흔적을 다수 확인할 수 있었다. ‘가야의 왕궁’은 아직 베일에 싸여 있지만, 상위 계층의 존재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유구와 유물이 계속 발견되고 있어 앞으로의 조사 결과가 주목된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연차적인 전면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의 성격을 뚜렷하게 밝히고 이를 가야사 복원과 연구에 필요한 기초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


좌우명 : 아무리 얇게 저며도 양면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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