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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노찾사' 출신 민중가수 김정연, 국민리포터 거쳐 '명품강사'로 거듭나다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내가 엄마가 되기전에는 언제나 식기전에 밥을 먹었다/ 얼룩 묻은 옷을 입은 적도 없었고/ 전화로 조용히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 내가 엄마가 되기전에는 원하는 만큼 잠을 잘 수 있었고 / 늦도록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날마다 머리를 빗고 화장을 했다/...(중략) 시인 류시화의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는>전재.

독재타도 함성 높았고 최루탄 연기 자욱했던 80년대. 민주화 물결타고 거리로 지하다방으로 내몰리며 갈 곳 몰라 암울했던 청춘들이 반백의 나이에 흰머리 듬성한 중년이 되어 기억에 남아 위로받던 노래패 '노찾사'를 떠올리며 흥얼거리곤 한다.

젊었던 그시절 훌쩍 지나, 우리나이로 오십을 넘어, 일명 쉰세대로 불리우며 명퇴와 노후를 걱정하는 세대가 됐다.

386세대 끝자락 88학번 출신으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데뷔 후,<여섯시 내고향> 방송리포터로 전국을 누비며 <국민안내양>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가수 김정연 씨가 반 백의 나이에 명품강사가 되어 우리곁에 나타났다. 

그것도 머룻빛 눈망울 순한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내가 엄마가 되기전에는> 어떤 풀에 독이 있는지 신경쓰지 않았다 / 예방주사에 대해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누가 나한테 토하고 내 급소를 때리고/ 침을 뱉고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고/ 이빨로 깨물고 오줌을 싸고 / 손가락으로 나를 꼬집은 적도 한번도 없었다/... (하략) 

국민프로그램 <여섯시 내고향> 김정연의 인생버스 리포터로 확고한 자리를 잡은 가수 김정연이  대한민국 어머니들을 웃기고 울리는 명품강사로 거듭난 뒷 얘기를 들어본다.

Q : 얼마전 KBS 안동방송국 강연회를 울음바다로 만들었다는데...('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속담은 옛 말이 된지 오래다. 요즘은 소문이 실시간으로 지구 안밖을 넘나드는 세상이다.)

- 관객들 대부분 어머니 연배셨고 제 노래에 '뽕필'이 있어선지 쉽게 마음을 파고 들었나 봅니다. 제 개인적인 감정도 이입 되다보니 공감이 되었구요.. 울고 웃고 한 판 잔칫날 분위기였습니다.

Q : '노찾사'멤버로 데뷔하셨지요.?

- 연세대 100주년 기념관에서 처음 들었던 안치환선배의 '지리산'에 가슴이 뜨거워졌지요. 그길로 '노찾사'사무실을 찾았고 멤버가 됐습니다. '아침이슬'로 유명한 김민기선배가 정권의 탄압을 피해 사전심의를 뚫고 음반을 제작 할 때 입니다.지금은 한국 100대 명반에 올라 있을 정도로 그때 부르던 명곡들이 많이 실렸습니다.

'노찾사'는  '노래의 결'과 '사람의 무늬' 배웠던 인문학교

Q : '노찾사'멤버 시절 한국 근현대 노래 80년사' 끝나지 않은 노래' 공연 에서 큰 호응을 받았다는데...

- 당시 1,2부 공연 막간에 '싱얼롱' 순서가 있었는데 본공연이 감동을 주는 반면.'싱얼롱'은 흥을 돋우는 역할이었지요. 제가 그 순서를 맡아 진행했던 경험이 훗날 방송진행자로 자리잡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이후 '끝나지 않은 노래"공연 에서 '복지만리'를 불렀지요. 대표적인 친일가요인데 심의통과용으로 끼워 넣었던 곡에 저의 뽕필(뽕feel)이 가미돼 기대밖의 반향을 불러왔다고 봅니다. '노찾사'시절은 제게 '노래의 결'과 '사람의 무늬'를 배울 수 있었던 인문학교나 다름 없었습니다.

Q : 민중가수에서 방송진행자로 길을 바꾸게 된 동기는..?

- 저는 내안에 있는 상상의 힘을 믿습니다. '성공적인 이미지를 내게 투사하고 그대로 실천하다보면 이룬다'는 단순하나 고집스런 성격과 노력이 오늘의 김정연을 만들었다고 봅니다. 당시  유행하던 문화센터 라디오리포터 과정을 거쳐 K-본부 <통일열차>로 입봉했습니다. 주변에서 도움을 주셨던 고마운 분들 덕분입니다.

방송의 생명인 정보와 취재 현장리포트까지 발로 뛰면서 쉬임없이 해냈던 시절인데 10년을 훌쩍 넘기다 보니 삶에 변화를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텔레비젼으로 '상상력'을 옮겼습니다.

Q : 남들은 하나 하기도 힘든 일을 해내셨군요. 가수에 라디오 리포터 거쳐 텔레비젼방송진출까지...오로지 상상력의 산물만은 아닌 것으로 느껴집니다만..

- 나이 서른 여덟에 라디오를 하면서 텔레비젼 까지 하다보니 방송환경이 달라 적응이 쉽지 않았습니다. 취재와 대본 만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메이컵, 의상, 카메라 까지..'노찾사' 시절에 많은 대중을 휘어잡으며 노래했던 경험이 '세상은 넓다'를 거쳐 '세상의 아침'까지 상상력의 날개를 달아줬지요. 그러나 '나이가 많다'는 편견앞에서 벽에 부딪치게 됐습니다. 그리고 결혼...

민중가수 열정에 흥과 정한을 담아 '명품힐링강사'로

Q : 요즘 인기를 얻고있는 '어르신들과 소통하는 비결' 이라면..?

- 힐링이 대세인 시절입니다. 10년 넘도록 시골 어르신들과 프로그램을 진행해오고 민중가수출신 트로트가수라는 이름표에 엄마라는 타이틀이 더해지니 비로소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가수라는 열정에  무대의 흥을 입혀 어미의 정한을 담아내니 노랫말도 토킹도 가슴에 와닿는 것이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어미라는 단어가 주는 숙명적인 느낌이 참 좋습니다.

더하자면 어르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지혜가 저를 키워줬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내 부모라는 느낌에 저의 지난날을 대입해 간접경험을 하는 것이지요. 

효(孝)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시골길에서 얻어 배운 것이 참 많습니다.제가 이래뵈도 기네스북에 오른 시골버스 탑승기록 보유자 입니다.

Q : 효(孝)를 어떻게 정의 하십니까..?

- 요즘 핵가족 시대지요. 시골마을에서 60대 이하 장년들 보기 힘들고 신생아들 귀합니다.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도시로 나가 공동화 현상을 빚고 있습니다. 저는 효를 '목소리'로 정의 합니다. 전화 한 통화, '잘지내시느냐..!'는 안부 한 마디가 효의 전부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골 어르신들 자녀들 목소리에 굶주려 있다시피 합니다. 한루 한 번씩 전해주는 따뜻한 한마디가 크나큰 위로가 된다 생각합니다. 그다지 어려운 일 아닙니다만 다들 바삐 사는지...

Q : 늦은 출산이 가져다 준 심경의 변화라면.?

- 사람의 힘, 아니 생명의 위대함에 눈뜨게 됐습니다. 한 때 가족들과 담을 쌓고 절연의 늪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욕심이 빚은 단절이었지요. 아이를 얻고나니 비로소 어머니의 삶과 '어미'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에 오래 목이 메었습니다. 

아이를 통해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경험, 엄마가 되고 나서야 어미의 숙명을 이해하게되는 숙연함에 한 동안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생명의 거룩한 순환질서에 감동했다고나 할까요..

저는 집에서 아이에게 할머니의 존재를 '엄마의 엄마'로 부르며 이해시키려고 노력합니다.늦은 출산은 제게 경이로운 축복이었습니다. 삶의 원동력이고요..

Q : 나이 오십에 트로트가수 공연과 강사의 길을 선택한 이유라도..?

-  '노찾사'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입니다. 그동안 경험했던 가수, 방송인의 삶에다 '힐링'을 더하니 비로소 길을 찾은 느낌입니다. 무대위의 전달자와 방송매체를 통한 간접교류에서 벗어나 관객들과 호흡하는 생동감이 아주 좋습니다. 더구나 엄마가 되니 없던 힘과 용기가 솟아난다고 할까요. 아이를 통해 얻은 생명의 위대함과 가족의 소중함을 함께 나누는 소통을 지속할 계획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힘이 되주는 '힐링천사'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남성의 입장에서 엄마라는 의미를 이해하기 쉽지않다. 서두에 류시화 시인의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는>시를 쓰면서도 공감이 덜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 현충일, TV 화면에 비친 국립현충원 묘역에 손수건 말아쥐고 무릎 세워 턱고인 할머니, 누군가의 어머니, 할머니의 굽은 허리 위로 하늘 빛이 흐리다.

김종혁 기자  kjh@m-i.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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