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 13대 임금 명종,인순왕후 강릉(康陵) 순창원(順昌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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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 13대 임금 명종,인순왕후 강릉(康陵) 순창원(順昌園)
  • 김종혁 기자
  • 승인 2016.07.30 15: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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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강릉(康陵)은 조선 13대 임금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다. 순창원(順昌園)은 조선 13대 명종의 원자인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합장 원이다.

능의 구성

강릉 병풍석

강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봤을 때 왼쪽이 명종, 오른쪽이 인순왕후의 능이다.

전체적인 능침은 문정왕후의 태릉과 같은 형태로 조성해,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둘렀고,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 석마, 문무석인 등을 배치했다. 능침 아래는 홍살문, 향·어로, 정자각, 비각이 있고, 정자각 왼편에는 둥근 어정(御井)이 있다. 어정이란 왕이 마실 물을 위해 판 우물을 말한다. 광릉, 숭릉에서도 볼 수 있다.

능의 역사

명종,인순왕후 강릉 능침 사진=문화재청

명종은 모후 문정왕후의 3년 상을 마친 후 며칠이 지난 1567년(명종 22년)에 세상을 떠나, 태릉 동쪽 언덕에 먼저 능을 조성했다.

그 후 1575년(선조 8년)에 인순왕후 심씨가 세상을 떠나자 명종의 강릉 좌측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했다.

명종(明宗) 이야기

명종(1534년~1567)은 중종과 문정왕후 윤씨의 아들로 1534년(중종 29년)에 태어났다. 1539년(중종 34년)에 경원대군에 책봉됐고, 1545년(인종 9개월)에 이복형 인종의 유명(遺命)으로 왕위에 올랐다.

강릉 무석인

1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탓에 모후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고, 수렴청정 기간 중에 을사사화, 양재역 벽서사건 등을 계기로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과 소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됐다.

이에 따라 왕권은 실추되고 외척 일족의 수탈로 민생이 피폐해져 사회가 불안했으며, 거듭되는 흉년으로 민심마저 흉흉해졌다. 이런 상황에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1553년(명종 8년)에 친정 선포 후, 외척을 견제하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 선정을 펴보려 했으나, 소윤과 문정왕후의 권세에 눌려 뜻을 펴보지 못했다.

1563년(명종 18년)에 외아들 순회세자의 급서와 1565년(명종 22년)에 문정왕후의 승하를 겪은 후 1567년(명종 2년2)에 경복궁 양심당에서 34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호사설 기록 조선 3대 도둑 '홍길동, 장길산, 임꺽정'

이익은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조선의 3대 도둑을 홍길동, 장길산 그리고 임꺽정으로 꼽았다. 이 중 임꺽정은 16세기 중반 명종 재위 시에 함경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도둑으로 양주의 백정 출신이다. 자신의 천한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무리를 지어 다니며 도둑질을 일삼다가 훔친 곡식 등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줘 의적으로 불렸다.

강릉전경

이들은 명종 대에 정치적인 혼란과 흉년이 이어지는데다, 관리들의 타락과 부패가 심해져 민심이 흉흉하자, 세력을 모아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들을 빈민에게 나눠주며 의적 행각을 벌였다.

1559년(명종 14년)에는 개성까지 쳐들어가 도둑질을 하는 등 과감하게 행동반경을 넓혔다가 참모와 가족들이 체포되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됐다.

임꺽정 일당에 대한 다음과 같은 사신의 평이 '명종실록'에 실려 있다.


"국가에 선정(善政)이 없고 교화가 밝혀지지 않아 재상들의 횡포와 수령들의 포학이 백성들의 살과 뼈를 깎고 기름과 피를 말려 손발을 둘 곳이 없고 호소할 곳도 없으며 기한(飢寒)이 절박하여 하루도 살기가 어려워 잠시라도 연명(延命)하려고 도적이 되었다면, 도적이 된 원인은 정치를 잘못하였기 때문이요 그들의 죄가 아니다. 어찌 불쌍하지 않은가"

'재상들의 횡포와 수령들의 포학' 부분은 어째 요즘의 세태와 닮은 구석이 있어 씁쓸하다.

인순왕후(仁順王后) 이야기

인순왕후 심씨(1532~1575)는 본관이 청송인 청릉부원군 심강과 완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1532년(중종 27년)에 태어났다. 1542년(중종 27)년에 경원대군과 결혼해 부부인(府夫人)이 됐으며, 1545년에 왕비로 책봉됐다.

1551년(명종 6년)에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1563년(명종 18년)에 어린 나이로 급서하는 비운을 겪었다. 1567년(명종 22년)에 명종이 세상을 떠나자, 후사가 없어 중종의 아들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선조)을 양자로 입적시켜 대통을 잇게 했다.

선조가 16세에 즉위하자 계승상 모후가 되는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8개월만에 물러났다. 그 후 1575년(선조 8년)에 창경궁 통명전에서 44세로 세상을 떠났다.

왕이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미처 정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 왕위 계승 결정권은 형식적으로나마 대비에게로 이양된다. 대비는 사적으로는 새로 왕이 될 자의 어머니며, 선왕의 부인이다.

비록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이지만 대비는 국모로서의 권한과 함께 왕실의 최고 어른이라는 지위를 갖는다. 인순왕후는 명종이 임종을 맞을 당시 양심당의 소침 병풍 뒤에서 명종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명종과 인순왕후 둘 사이에는 아들 순회세자가 요절한 탓에 명종의 뒤를 이을 후손이 없었다. 그러나 생전에 명종은 자신의 이복형인 덕흥군(중종과 창빈 안씨의 아들)의 아들 하성군을 의중에 두고 있었다. 이와 같은 명종의 의중을 알고 있었던 인순왕후는 당시 16세이던 하성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다. 그가 조선의 14대 왕 선조이다.

제13대 명종 원자 순회세자 · 공회빈 순창원(順昌園)

원의 구성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는 순창원 원침

순창원은 조선 13대 명종의 원자인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합장 원이다.

원소(園所)는 추존 덕종의 경릉(敬陵)의 예를 따라 간소하게 조성했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향로와 어로, 정자각이 배치돼 있고, 비각과 표석은 설치하지 않았다.

원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봉분만 조성했으며,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했다.<위 사진 참조>

원의 역사

순창원 문석인

1563년(명종 18년)에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고양 경릉(敬陵) 근처인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했다.

이후 공회빈 윤씨가 1592년(선조 25년)에 세상을 떠나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의주파천이 결정되면서 장례를 치루지 못했다.

선조는 임시로 후원에 가매장의 명을 내리고 한양수복 후 공회빈의 시신을 찾으려 했으나 끝끝내 찾지 못했다. 왜란이 종결 된 후 겨우 신주를 만들어 봉안했다. 1870년(고종 7년)에 원호를 순창원(順昌園)이라 했다.

순회세자(順懷世子) 이야기

순회세자(1551~1563)는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원자로 1551년(명종 6년)에 태어났다. 1557년(명종 12년)에 왕세자로 책봉됐고, 1561년(명종 16년)에 가례를 올렸으나, 2년 뒤인 1563년(명종 18년)에 13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회빈(恭懷嬪) 이야기

순창원 정자각

공회빈 윤씨(1552~1592)는 본관이 무송인 윤옥과 파평윤씨의 딸로 생년은 미상이나<선조수정실록>에 10세에 왕세자빈으로 간택됐다고 기록돼 있어 1552년(명종 7년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561년(명종 16년)에 순회세자의 빈으로 황대임의 딸이 왕세자빈으로 간택됐으나 병으로 인하여 간택을 중단하고, 대신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됐다.

그러나 1563년(명종 18년)에 순회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덕빈(德嬪)의 칭호를 받았다. 이 후 1592년(선조 25년)에 추정나이 41세로 세상을 떠났다.<자료출처=문화재청,조선왕릉관리소,공공누리집>


좌우명 : 아무리 얇게 저며도 양면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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