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제10대 임금 연산군 이야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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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제10대 임금 연산군 이야기 -하-
  • 김종혁 기자
  • 승인 2016.07.25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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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조선왕조 임금들 가운데 연산군 만큼 후대의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임금도 드물다. 폐비의 아들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인물, 또는 폭정과 잔인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묘사돼,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나 소설은 차고 넘친다..

연산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자 그를 독살하려는 시도가 셀 수 없이 많았으나 한때 그를 동정했던 당시 강화 부사의 노력으로 독살을 모면했다.

함께 유배됐던 그의 왕자들은 반대파에게 사사되거나 처형 당했다. 중종은 조카들의 나이가 어리고 형세가 고단한 점을 들어 처벌을 반대했지만, 대신들의 강력한 요청을 수용하고 말았다.

공신들은 훗날 누군가 이들 왕자들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세력이 결집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강화도에 유배됐고 교동도로 다시 이배됐던 연산군은 교동도에 유배된 지 2개월 뒤인 그해 음력 11월에서 역질을 앓다가 역질, 화병 등의 후유증으로 병사했다.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 부인인 폐비 신씨가 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한다. 연산군 사망 후 민중에서는 독살설이 퍼졌다고 한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장례와 제사 문제

1516년(중종 11년)부터 연산군의 제사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사망 직후부터 제사는 부인인 거창군부인 신씨가 지내고 있었다.

중종은 연산군의 제사를 보통 왕자군보다는 상향해서 지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는데 연산군은 왕위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한때 국왕을 지낸 사람이고, 중종과는 형제가 되는 지친(至親)이었다.

게다가 조선 왕실은 고려 국왕의 제사까지 이어지게 했으므로, 명분이나 인정으로 볼 때 연산군의 제사가 끊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신분은 왕자군의 신분으로 하되 제사는 그보다 상향해서 치르게 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관례대로 종실 가운데 한 사람을 연산군의 후사로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하려 했지만 중종은 연산군의 후사가 문제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결국 중종은 결정을 미뤘고, 사관은 '상(중종)이 폐주(연산군)의 후사가 없는 것을 슬퍼했었다면, 동기간의 두터운 정으로 종실 사람을 선택해 후사를 이어가게 하고, 부박한 논의에 저지당하지 말았어야 했다.'며 중종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비판했다.

1537년(중종 32년) 4월에 거창군부인 신씨가 사망했다. 신씨의 장례는 왕자군 부인의 장례보다는 격이 높고 왕비 부모님의 장례보다는 낮은 수준으로 거행했다.

다시 연산군의 후사를 세우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은 외손봉사(外孫奉祀)로 결정됐다. 연산군과 신씨 사이에는 외동딸 휘신공주 이수억이 있었다.

공주는 처음 휘순공주로 봉해졌다가 휘신공주로 작호가 변경됐다. 1503년(연산군 9년) 휘신공주는 부왕 생존시 구문경에게 출가하여 아들 구엄을 얻었다.

구엄은 연산군의 외손봉사를 하면서 왕실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다. 오래도록 왕실의 외척으로 예우를 받았고, 범죄를 저질러도 연산군의 제사를 끊어지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감형의 혜택을 받는다.

그러나 구엄에게도 아들이 없었고 구엄이 사망한 후 그의 외손인 이안눌이 연산군의 제사를 계승했다. 이안눌은 구엄의 친외손자는 아니었는데 이형(李泂)의 아들로 태어나 아저씨뻘 되는 이필의 양자로 입양됐고, 이필의 부인이 바로 구엄의 딸이었다.

연산군의 제사는 부인 신씨가 시작해 외손자인 구엄에게 맡겨지고, 다시 구엄의 외손자인 이안눌과 그의 후예들에게로 이어졌다.

사후 연산군

사망 직후 묘소는 강화도 현지에 안장됐다. 그러나 1512년 12월에 강화도에 홍수가 일어나 묘소가 침식되고, 신씨는 이 참에 남편의 묘소를 양주 해촌(海村)으로 이장해 줄 것을 요청했다.

군부인 신씨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1513년 3월에 양주군 해등촌(海等村, 지금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이장됐으며, 왕자군의 예우대로 장사됐다. 묘소에는 '연산군지묘'라는 석물 이외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묘소의 관리는 현지의 관리가 담당했다.

훗날 폐위된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시대 폐주의 한 사람인 연산군은 성종의 제2계비인 폐비 윤씨가 폐위되기 전에 태어나 적자의 신분으로 세자에 책봉됐으나 폐위 후 후궁 소생의 왕자의 신분인 군으로 강등당했다.

조선 왕실의 족보인 선원계보(璿源系譜)에도 묘호와 능호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 기록돼 있다. 그의 재위기간의 실록 역시 실록이 아닌 <연산군일기>로 통칭됐다.

조선시대 내내 폭군과 패륜아의 전형으로 지탄받아오다 1970년대 이후에 재평가 여론이 등장하기 시작됐다.

흥청망청의 기원

그는 각도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採靑使)를 파견해 미녀와 양마(良馬)를 구해오게 했으며,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낸뒤 성균관을 놀이터로 삼고, 한성부 내 각 사찰을 연회장, 유흥장으로 만드는 등 황음(荒淫)에 빠졌다.

이때 선발해 들인 흥청들과 그들의 식비, 유흥비로 국가 정사가 피폐해졌다 하여 흥청망국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 말은 곧 흥청망청의 어원이 됐다.

또한 폐비 윤씨의 복위를 강하게 반발하는 사림파에 대한 반발로 치세 후반에는 경연 등을 없애 학문을 중단했고, 사간원과 사헌부를 폐지하여 언로(言路)를 막기도 했다.

고문과 가혹 행위

연산군은 고문행위에 대한 전례를 찾아서 악형을 가하여 폭군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의 치세 중에 행해진 고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압슬, 포락(炮烙, 단근질하기), 물구나무 후 물고문, 착흉(斮胸, 가슴 구타), 주리 틀기, 불판을 걷게 하기, 능지처사, 촌참(寸斬, 토막토막 자르기) 등의 형벌이 있었다.

또한 사형자 혹은 이미 죽은 자의 시신을 갈아서 바람에 날려버리는 쇄골표풍(碎骨瓢風) 등도 당대에 행해진 악형이었다. 특히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등 두 차례나 큰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류를 희생시킨 점 때문에 사림파의 집권 이후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1910년까지 폭군의 전형으로 길이 남게 됐다.

한편, 연산군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사 당시 약사발을 들고 갔던 우부승지 이세좌가 집에 돌아와 이를 말하자 이세좌의 부인은 "우리 집안에 남자가 하나도 남아나지 않겠구나." 하며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부인의 예언대로 연산군 치세 중 그의 일가들이 연좌되어 처형당한다.

1504년 그는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는 단상제(短喪制)로 할머니 인수대비의 상을 하여 논란이 됐다.  연산군은 할머니인 인수대비에 대한 3년상 대신 25일로 장례를 치뤘다.

인수대비의 초상 중 그는 하루를 1개월로 계산해 25일만에 장례를 마쳤는데 이를 역월지제라 한다. 그의 인수대비 25일장은 인조의 소현세자 7일상과 함께 조선왕조가 끝날때 까지 두고두고 성리학자와 선비들 사이에 지탄의 대상이됐다.

서울연산군묘역, 딸 휘순공주와 사위 구문경의 묘도 함께 조성됐다.

연산군의 딸(휘순공주)과 사위(능양위 구문경) 이야기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는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장녀로 태어나, 휘순공주에 봉작됐다. 1501년(연산 7년)에 구문경과 결혼했고,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작호가 삭탈됐다.

연산군의 사위 능양위 구문경은 본관이 능성인 구수영과 길안현주(세종 아들 영응대군 딸)의 아들로 태어나, 1501년에 능양위가 됐다.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작호가 삭탈됐으며, 반정 이후 구수영이 중종에게 구문경과 휘순공주의 이혼을 주청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서울연산군묘역에 휘순공주와 함께 묻혔다. <자료출처=문화재청,공공누리,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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