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을 만나다 제4대 세종,소헌왕후 합장릉 "영릉(寧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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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을 만나다 제4대 세종,소헌왕후 합장릉 "영릉(寧陵)"
  • 김종혁 기자
  • 승인 2016.07.1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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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중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첫 합장릉(合葬陵) 형식
조선 제4대 임금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합장릉 사진=문화재청

[매일일보]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됐다.

1469년(예종1년)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했다.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는 회격식으로 조성했다.  무덤 앞에는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했다.

세종대왕 신도비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했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능의역사-

1446년(세종 28년)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했다.

이 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했다.

세조대에 들어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년)에  여주로 옮겨 왔다.

여주로 천장하면서 원래의 영릉 터에 있었던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혔다.

-영릉의 천장지 결정에 관여한 사람들-

예종실록 1468년(예종 즉위년) 9월 13일자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 등이 영릉에 가서 장지를 보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영릉 근방에는 쓸 만한 땅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이 수고했으나, 다시 가서 살펴보는 것이 좋겠는데, 다만 높은 곳은 필요하지 않다.” 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에 더해 예종실록1468년(예종 즉위년) 12월 1일자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상당군 한명회(韓明澮), 예조판서 임원준(任元濬), 한성부 윤 서거정(徐居正)을 불러서 지리서를 참고해, 영릉 산세의 길흉을 의논하게 하니, 한명회가 아뢰기를,
“옛 임강현의 터가 능침을 쓸 만한 땅입니다. 청컨대 거주하는 백성들을 옮기고 초목(草木)을 기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승정원으로 하여금 그 편부(便否)를 원상(院相)에게 물어 보게 하였다.
위와 같이 영릉을 정하는 데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인지, 한명회, 서거정 등이 참여했다

-세종대왕과 15세기 과학 발전시대-

측우기는 강우량을 측정하기위해 1441년(세종23년)에 만들었다 사진=문화재청

우리나라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15세기를 세종대왕의 세기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이 학문의 으뜸으로, 과학이나 기술학은 이에 비해 경시됐다.

또한 과학자들은 장인(匠人)이라 하여 명예를 누리지 못했고, 경제적으로도 높은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세종은 과학기술이 국가의 근간을 다지는 중요한 발판이라고 여기고 선진 과학기술을 수용하고 고유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결과적으로 15세기에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에 이르렀다.

-세종의 과학 장려 정책-

세종은 자유로운 연구 분위기를 조성하여 집현전 학자들에게 일종의 연구를 위한 안식년인 ‘사가독서(賜暇讀書)’제도를 두어 연구에 전념하게 했다.

한편 기술혁신을 위한 지속적인 정책을 전개해 과학성과 실용성을 동시에 추구했으며 기술개발을 위한 거시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기술 습득을 위해 인재를 뽑아 중국에 유학시키고 이들을 두뇌 집단화하여 공동연구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세종과 그의 아들 문종의 휘하에는 장영실, 정초, 정인지, 이천 등의 우수한 과학자들이 몰려들어 훌륭한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왕립 천문대 간의대-

조선 중종때 개량된 자격루 국보229호, 덕수궁에 보존돼 있던것을 본떠 만들었다 사진=문화재청

세종은 관료와 학자, 기술자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간의대(簡儀臺) 사업을 성공리에 완수할 수 있었다.

1432년(세종 14)부터 7년여에 걸쳐 추진된 왕립 천문대를 건설하는 간의대사업에는 정초, 정흠지, 정인지, 이천, 장영실, 박연 등이 참여했다.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약 10m 높이의 노대를 만들고 돌난간을 둘러 만든 간의대에는 혼천의, 혼상 등을 부설한 대간의를 설치했다.

매일 밤 5명의 관리가 숙직하며 천체를 관측했고, 24절기를 확정하여 농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종, 징, 북이 울려 시간을 알리는 자격루-

 자격루는 1434년(세종 16년)에 장영실 등이 제작한 물시계로서 종과 징, 북이 저절로 울리면서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를 부착한 것이다.

자격루의 원리는 맨 위에 있는 큰 물그릇에 넉넉히 물을 부어주면 그 물이 아래의 작은 그릇을 거쳐, 제일 아래쪽 길고 높은 물받이 통에 흘러든다.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가 점점 올라가 미리 정해진 눈금에 닿으며, 그곳에 장치해 놓은 지렛대 장치를 건드려 그 끝의 쇠 구슬을 구멍 속에 굴려 넣어준다.

이 쇠 구슬은 다른 쇠 구슬을 굴려주고 그것들이 차례로 미리 꾸며놓은 여러 공이를 건드려 종과 징·북을 울리기도 하고, 또는 나무로 만든 인형이 나타나 시각을 알려주는 팻말을 들어 보이기도 한다.

<자료출처=문화재청,국립중앙박물관>


좌우명 : 아무리 얇게 저며도 양면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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