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노무현 연상시킨 ‘업그레이드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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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노무현 연상시킨 ‘업그레이드 유시민’
  • 김경탁 기자
  • 승인 2010.06.04 17: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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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 경기도지사 범야권 단일후보, 3개월 만의 턱밑 추격…얻은 게 더 많은 낙선

▲ 유시민
[매일일보=김경탁 기자] 아쉽게 패배했지만 가능성을 확인한 선거였다. 비록 유시민 본인은 패배의 쓴잔을 마셨을지언정 ‘폐족’의 위기에 몰렸던 ‘노무현가문’이 그가 불러일으킨 바람으로 이번 선거를 통해 부활에 성공했다는 것은 무엇보다 큰 수확이다.

유시민 경기도지사 후보가 국민참여당에 입당한 것은 지난해 11월이었고, 국민참여당이 공식 창당한 올 1월까지만 해도 당이 그에게 요구한 것은 서울시장 출마였다. 노무현가문의 대모인 한명숙 전 총리가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출마 의지를 밝힘에 따라 경기도지사 출마로 방향을 정한 것이 3월초였다. 불과 3개월 전의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50% 대를 넘나들고 있고, 천안함 사건으로 거센 북풍이 불었다. 경쟁자인 김문수 후보는 민선자치 도입 후 첫 경기도지사 재선 도전자였다. 오래전부터 재선을 준비해온 김문수 지사의 지난 4년 도정에 대한 도내 평가도 나쁘지 않았고, 드러나 있는 약점도 거의 없었다. 선거전을 시작할 때까지 지지율 차이는 두 배 이상이었다.

그리고 3개월의 여정 끝에 뚜껑을 열어서 나온 결과는 4.41%, 19만160표 차이였다. 민주당이나 한나라당과 같은 방대한 지역 말단 조직망 없이, 결코 우호적이지 못한 언론환경에서 후보 개인의 이슈장악 능력과 그 지지자들의 자발적 동원이 이뤄낸 성과다.

낙선 정치인 유시민이 얻은 것과 극복해야 할 과제

북풍 변수는 논외로 하더라도 민주당 조직이 제대로 가동됐다면, 심상정 후보 사퇴 사실이 제대로 알려져 18만여표에 달하는 무효표 중 상당수가 제대로 찍혔다면, 언론환경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공평했다면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선거였다.

특히 사람들은 이번 6․2지방선거 경기도지사 선거 과정의 유시민 후보를 통해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걸어온 험난한 정치역정을 연상했다.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가치가 한층 업그레이드됐다는 말이다.

▲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에서. (사진=MBC 중계방송 캡쳐)

단일화와 희망돼지의 추억

지난 4월 ‘유시민펀드’가 대박(?)나면서 경기도지사 예비후보 유시민이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예비후보후원회제도 폐지에 따라 선거자금을 모을 방법이 없어서 생각해낸 궁여지책이었지만 펀드모집 3일만에 선거비용 제한액인 40억7300만원을 채워 마감이 됐고, 자금 마련 외의 홍보효과도 톡톡히 얻었다.

총 8천여명이 후원약정을 맺은 가운데 후원약정을 하고도 펀드모집 마감으로 입금하지 못한 사람만 1300여명에 달했다. 2002년 대선 당시 지지율 하락과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던 노무현 후보를 기사회생시켰던 소액후원금의 쇄도를 연상시키는 장면이었다.

5월 초 중순, 공식선거운동 시작을 코앞에 두고 유시민 후보는 민주당 김진표 후보와의 단일화경쟁에서 0.96%라는 미세한 차이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거센 바람몰이를 시작했다. 민주당 쪽이 7대 1 정도 일방적이고 압도적으로 유리할 것이라 관측되는 방식이었다.

2002년 당시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 측의 요구를 무한 수용하면서도 끝내 단일화 승리를 거머쥐었던 노무현과 그 지지자들의 저력을 떠올리게 했고, 노 대통령 서거 1주기와 맞물리면서 긴가민가하면서 가라앉아있었던 지지자들의 심장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후 민주노동당 안동섭 후보와의 단일화에 성공했고, 창조한국당의 지지 선언으로 야4당 연대를 쟁취한데 이어, 완주의사를 계속 밝혔던 심상정 진보신당 후보도 결국 유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사퇴했다. 여기에 원내 3당인 자유선진당 등 다른 보수야당들도 후보를 내지 않음으로써 1987년 양김 분열 이후 최초의 야권 단일화에 성공했다.

‘비토론’의 악몽

경기도지사 출마를 선언한 직후부터 ‘유시민 비토론’이 등장했다. “유시민은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서 안 된다”는 것이다. 원조가 ‘김대중 비토론’이라는 점에서 이 ‘유시민 비토론’을 처음 구사하기 시작한 것이 민주당 정치인들이라는 것은 아이러니였다.

1971년 대선 때부터 1997년 대선 전까지 ‘색깔론’과 함께 정치인 김대중의 뒤를 늘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던 비토론의 요지는 ‘참 똑똑하지만 싫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것으로, ‘옳은 소리를 싸가지 없게 한다’는 말로 요약되는 ‘유시민 싸가지론’(?)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었다.

이번 선거를 통해 유시민의 눈빛과 표정, 태도, 말투 등이 과거에 비해 많이 원숙해지고 부드러워졌다는 평이 나왔고, 정작 ‘싸가지’론의 원저작자인 김영춘 전 의원도 “명석한 유시민이 이제 겸양과 온유함까지 체득했다”며 지지를 선언했지만, ‘싸가지’론으로 대표되는 ‘유시민 비토론’은 김문수 후보측이 유시민 후보를 공격하는 소스로 선거기간 내내 활용됐다.

특히 유시민이 지난 9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비토론’을 근거로 ‘조순 대안론’을 내놓았었다는 사실과 김대중 대통령 임기말 시사평론가로서 그가 쏟아냈던 날선 비판의 글들은 한나라당이 활용하기 좋은 소재였다.

김문수 후보 측은 이와 관련해 ‘전 국회의원 등 구 민주당 출신 인사들의 김문수 지지선언’과 ‘전국 호남향우회의 중립 선언, 호남비하 유시민 지지 거부’ 등의 보도자료를 잇달아 냈고, 이는 각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그러나 김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는 ‘구 민주당 출신 인사’들의 이력을 보면 실제 민주당을 거치지 않았거나 민주당을 거치기는 했지만 3당 합당 등을 통해 민자당, 한나라당, 자민련 등에 유입됐던 인사들이었고, 심지어 사망한 사람의 이름까지 도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호남향우회 중립선언’ 보도자료 역시 친한나라당 성향의 일부 지역 향우회장들이 다른 지역 향우회장들의 이름을 도용해 성명서를 작성한 사실이 드러나 명의도용 피해자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다.

이와 관련해 유시민 후보는 공식선거운동기간 초반인 지난 5월24일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의 주선으로 동교동을 찾아 김 전 대통령 미망인 이희호 여사에게 자신이 과거 김 전 대통령에 대해 했던 비판들에 대해 사과의 뜻을 전하고 격려의 말을 들었다.

이 소식은 인터넷 매체들을 통해 재빨리 전달되었지만, 인터넷을 제외하고는 유시민 후보에 대한 언론환경이 전혀 우호적이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유 후보에게 유리하게 나올 수 있는 이런 보도가 얼마나 오프라인 매체를 통해 전달이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 유시민 후보가 박지원 원내대표와 함께 24일 오전 동교동 故김대중 전 대통령 도서관을 예방해 이희호 여사와 권노갑 민주당 전 고문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뉴시스)

왜 졌을까? 2002년 대선과의 차이…

유시민 후보는 김진표 후보와의 단일화가 성사된 후 정세균 민주당 대표를 만나 “도지사 선거는 공중전에 미디어이벤트이고, 시장군수와 지방의원선거는 지상전”이라며, “공중전은 제가 확실히 해낼 것이니, 민주당은 조직력으로 함께하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선거 과정에서 민주당 지도부와 민노당 지도부는 이번 선거가 자신의 선거라는 자세로 적극 유세지원에 나섰지만 최종 결과나 나오기 전부터 한계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개별 하부조직의 경우 각자 자기선거운동을 하기에 빠듯했던 만큼 지도부만큼 유시민 선거운동에 열성적일 수는 없었다.

유 후보의 기호가 ‘2번’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나마 이름이 투표용지 세 번째 자리에 있었다는 점도 무시하지 못할 변수였던 것으로 관측된다. 1번 김문수, 7번 심상정, 8번 유시민 등 총 3명의 후보가 출마한 이번 선거에서 투표용지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한 것은 투표일을 사흘 남기고 사퇴한 심상정 후보였다.

그런데 투표일이었던 2일 경기도의 각 투표소에서는 심상정 후보의 사퇴 사실을 알리는 공지문이 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붙여져 있다는 항의가 쇄도했고, 실제 투표 후에서야 사퇴사실을 알았다는 유권자도 적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5월30일 사퇴의사를 밝힌 심상정 후보가 정작 사퇴신고서를 제출한 것은 이틀 뒤이자 투표일 하루 전인 1일 오후 2시였다. 심 후보의 사퇴신고서를 뒤늦게 접수한 경기도 선관위는 부랴부랴 관련 공지문을 인쇄해 밤늦게 각 투표소에 배포했다.

하지만 유권자들의 동선을 감안한 가장 최적화된 위치에 공지문이 붙어있지 않은 지역이 많았다는 전언이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선관위의 악의를 의심하는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고, 일부 미필적 고의로 의심되는 부분이 없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사상 최대인 1인 8표제 도입으로 인해 대부분의 투표소에서 동선을 새로 짜야했다는 점, 특히 교회나 성당 등 종교관련 시설을 투표소로 사용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이번에 처음 투표소로 지정된 곳이 많았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여기에 더해 유시민 후보를 출마시킨 국민참여당이 경기도 모든 투표소에 투표참관인을 보낼 수 있을 정도의 당세를 가지고 있지 않고, 정당 활동이 처음인 당원이 많아서 이러한 문제점을 조기에 시정하지 못한 것은 뼈저린 부분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더욱이 경기도지사 선거는 광역단체 중 최대 유권자, 강원도를 제외하면 최대 넓이 지역구라는 기본 특성과 함께 3개월이라는 짧은 준비기간, 국민참여당의 미약한 당세, 선관위의 사전 선거운동에 대한 엄격한 제한은 유 후보에게 극악의 조건이었다.

▲ 지방선거를 하루 앞둔 1일 유시민 후보와 김진표.안동섭 전 후보,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등이 필승을 다짐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시간의 한계

공식선거운동 기간에 벌어진 대형 이벤트들은 그나마 모자란 시간을 더욱 깎아먹었다. 공식선거운동 첫날인 20일 천안함 사건 공식발표가 있었고, 3일 뒤인 23일에 노무현 대통령 1주기 추도식, 뒤이어 24일 이명박 대통령 대국민담화 등이 이어졌다.

극도로 제한된 시간동안 넓은 지역을 포괄하기 위해 무리한 강행군을 벌인 유시민 후보는 성대에 무리가 왔고 결국 5월27일 있었던 선관위 주재 공식 토론이자 마지막 TV토론에서 정상적인 컨디션을 보여주지 못했다.

한편 선거 이튿날인 3일 유시민 후보와 정세균 대표가 만난 자리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우선 정세균 대표는 “언론사들이 여론조사에서 위기감을 조성한 바람에 선택과 집중을 하다보니 충분히 지원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열심히 잘 싸워주고 의미 있는 성과를 내 준 유시민 후보에 격려와 위로의 말 드리고 싶다. 더 큰 발전이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반면 유시민 후보는 정세균 대표와 손학규 전 대표, 박지원 원대대표 등 민주당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결실을 얻지 못해 죄송하다며, “거의 유일하면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자신의 역량부족”이라고 거듭 머리를 숙였다.

자리에 배석한 박지원 원내대표는 “앞으로 민주개혁세력이 집권하면 절대 이런 잘못된 선거는 치르지 않겠다는 각오를 했다”며, “어려운 여건에서 집중적으로 탄압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선전한 유시민 후보와 한명숙 후보도 사실상 승리자”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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