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단독 최초공개] 한 탈북여성의 생존 위한 음란채팅 ‘땐노방’ 경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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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단독 최초공개] 한 탈북여성의 생존 위한 음란채팅 ‘땐노방’ 경험기
  • 이한듬 기자
  • 승인 2010.06.04 1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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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여성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 “생존 위해 한국남성들 앞에서 옷 벗었다”

사진은 기사내용과 전혀 관계없음
[매일일보=이한듬 기자] 탈북여성과 중국동포 여성들을 고용해 음란 채팅사이트를 조직적으로 운영해온 일당이 최근 경찰에 붙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지난 달 30일 중국 심양지역을 비롯한 4개 지역에 속칭 ‘땐노방’이라는 음란 화상 채팅사이트를 만들어 국내 남성 회원들에게 음란 동영상을 유포하는 방법으로 14억원의 부당이익을 챙긴 사이트 운영자 나모(53)씨를 구속하고 2명을 불구속입건, 나머지 2명에 대한 검거에 나섰다고 밝혔다. '땐노'란 중국어로 컴퓨터를 뜻하는 덴나오(電腦)를 줄여 부르는 말이다.

경찰에 따르면 나씨 등이 중국에 채팅방을 개설한 이유는 단속가능성이 적고, 중국동포여성이나 탈북여성을 저렴한 인건비로 고용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들은 은신할 곳과 돈이 없는 탈북여성들의 궁핍한 처지를 악용해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은 탈북여성들이 또 다시 인권유린의 현실 속에 고통 받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다.

이번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데는 한 탈북여성의 증언 때문이었다. 제보자인 탈북여성 김숙영씨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안고 탈북을 감행했지만, 꿈과는 너무도 다른 현실 속에서 또 다시 고통을 맛봐야 했다.

과연 김씨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매일일보>은 김씨와의 전화를 통해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대로는 못 살겠다 싶었습니다”

지난 2007년, 북한 양강도 갑산에 살던 주민 김숙영씨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계속되는 생활고에 지쳐가던 김씨는 남편 박 모씨와 오랜 상의 끝에 두 딸을 데리고 탈북을 결심한 것이다.

이에 김씨는 2007년 2월 큰 딸(당시 17세)을 먼저 중국으로 탈출시킨 뒤, 이어 같은해 3월 작은 딸(당시 15세)을 데리고 중국으로 빠져나왔다. 다만 건강이 좋지 못했던 남편은 일단 북한에 남기로 했다.

삼엄한 경비를 피해 무사히 작은 딸과 함께 중국 심양에 도착한 김씨는 그러나 탈출에 대한 기쁨도 누리지 못한 채 다시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먼저 탈출한 큰 딸의 소식이 끊긴 것이다.

6개월이 흐른 지난 2007년 9월, 북한에 홀로 남아있던 남편 박모씨는 중국으로 탈출에 성공, 김씨와 재회했다. 하지만 남편의 건강이 예전보다 더욱 악화된 상태였다. 불안한 마음에 심양 지역의 한 병원을 찾은 부부는 남편이 대장암에 걸렸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야 했다.

신분이 불확실하고 중국말도 몰라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김씨 부부는 일단 빚을 내 병원치료비를 마련했다. 그러나 남편은 결국 암을 이기지 못하고 2008년 2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홀로 많은 빚을 떠안은 김 씨는 인근 농촌으로 팔려가 일을 하게 됐고, 몇 개월에 걸쳐 빚을 다 갚은 뒤 2009년 1월 작은 딸을 데리고 다시 심양으로 도망쳐 나왔다. 하지만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이 무렵 김씨는 또 다른 탈북여성을 통해 심양지역의 ‘땐노방’의 존재를 알게 됐다. 김씨는 처음 “컴퓨터 관련 일을 하는 곳”이라는 설명과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중국말을 몰라도 된다”는 얘기를 듣고 주저 없이 땐노방을 찾았다.

그렇게 찾은 땐노방은 인터넷 상에 개설된 화상 채팅사이트를 통해 김씨와 같은 탈북여성이나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남성들을 대상으로 화상 채팅을 나누는 곳이었다.

김씨는 처음엔 컴퓨터에 능숙하지 않고 한국의 채팅용어도 몰라 망설였으나, 이를 대신해주는 남자들이 있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설명을 들었다. 또한 은신처를 제공하고 수당을 제 때 지급한다는 말에 김씨는 땐노방에서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갈 곳 없는 탈북 여성의 쉼터가 땐노방?

일을 시작한 이후 김씨는 땐노방의 정체를 알게 됐다. 이곳은 단순한 화상 채팅 사이트가 아니라 김씨를 비롯해 땐노방에 고용된 탈북여성과 조선족 여성들이 사이트에 접속한 남성 회원을 대상으로 신체 일부분을 보여주거나 음란한 대화를 하는 방법으로 돈을 버는 곳이었다.

이를 위해 땐노방 측은 채팅여성을 고용할 때 한국에 있는 운영자가 직접 사전면접을 치러 얼굴만을 보여주는 여자인 이른바 ‘얼캠’과 몸을 보여주는 여자인 ‘몸캠’을 나눠 개개인에게 아이디를 부여했다. 형식상 이런 구분을 두긴 했지만 실제로는 한 여성이 ‘얼캠’과 ‘몸캠’ 역을 모두 소화하기도 했다.

한국 운영자의 지시를 받은 중국 현지의 관리자들은 이 여성들을 3~5명씩 나눠 일반 가정집에 작업장을 마련하고 일을 시켰다. 이 작업장이 김씨처럼 가진 것 없고 갈 곳 없는 탈북여성과 조선족 여성들의 생활공간이자 은신처이기도 했다.

김씨의 증언에 따르면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규칙을 철저하게 교육 받았다. 화상채팅 장소가 중국이라는 말을 하지 말고 한국인 것처럼 할 것. 서로 메신저, 이메일, 연락처를 주고받지 말 것. 다수방에서는 절대 몸캠 금지, 1:1방(독방 혹은 일방)에서 보여줄 것. 얼굴은 코 밑으로만 보여줄 것. 손님들과 싸우지 말 것. 만약 이것을 위반할시 아이디와 수당을 회수한다는 벌칙도 있었다. 그것은 일자리를 빼앗겠다는 협박이었다.

일을 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땐노방의 음란 화상채팅방을 이용하려면 남성회원이 포인트를 충전해야 했는데(1포인트 1원), 김씨가 해야 하는 일은 남성회원들이 가능한 많은 포인트를 충전하고, 소모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최신 한국 채팅용어나 타자에 미숙할 경우 고용된 여성들의 남자친구나 남편이 도와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도 궁핍한 처지에 있었기에 아내나 여자 친구가 하는 일을 알면서도 오히려 도와주기까지 했다.

이렇게 조를 이룬 상태에서 김씨는 먼저 사이트에 접속 중인 남성회원에게 한국여성인척 가장해 접근한 뒤 일정시간동안 무료로 음란 대화를 유도하면서 남성들의 성욕을 자극했다. 그러다 남성이 어느 정도 반응을 보이면 이 남성을 ‘다수방’ 혹은 ‘독방’의 채팅방으로 유인해 음란 화상 채팅을 이어갔다.

다수방은 30초당 150포인트, 독방은 2배 이상 비싼 375포인트의 접속비가 소진됐다. 때문에 땐노방 관리자는 남성회원들을 독방으로 이끌길 원했고, 채팅 장면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면서 김씨를 비롯한 채팅녀들에게 쪽지를 보내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독방으로 남자를 유인한 후에는 최대한 길게 시간을 끌며 남성 회원의 포인트를 많이 소진 시켜야 했다. 김씨를 비롯한 채팅녀들은 가슴과 신체의 은밀한 부위 등을 천천히 단계적으로 보여주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혹시라도 만남을 원하는 남성이 있을 경우 그의 거주지와는 먼 한국 지명을 이야기하거나 그럴듯한 핑계를 대가며 시간을 끌었다. 그럴수록 남성들의 포인트는 사라졌고, 김씨의 인권 또한 사라져 갔다.

김씨는 수치스럽고 모욕감을 느꼈지만 생계와 딸의 양육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했다. 다른 일을 하기엔 김씨의 불확실한 신분이 어눌한 중국말이 걸림돌이 됐다.

땐노방 관리자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김씨같은 여성들의 궁핍한 처지를 고의적으로 이용해 위협을 가하고, 음란 행위를 강요했다. 손찌검을 하거나 물리적인 강압을 가하진 않았지만, 생계수단을 담보로 한 위협은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김씨와 땐노방의 고용 여성들에게는 무엇보다도 공포스러웠다.

그렇게 세달이 흘렀을 무렵, 김씨는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작은 딸을 볼 면목이 없었다. 홀로 하나 남은 딸을 뒷바라지해야 하는 엄마로서 수치스러운 삶을 살 수는 없었다.

결국 김씨는 오랜 고민 끝에 한국행을 결심하고 땐노방 일을 그만두었다. 의외로 땐노방 관리자들은 김씨를 순순히 보내주었다. 다른 탈북여성을 고용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땐노방의 관리자들에게 탈북여성들은 그저 쓰고 버리는 돈벌이 수단에 불과했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김씨는 땐노방에서 함께 일하던 한 여성으로부터 그곳의 관리자들이 최근 나이어린 탈북여성들을 새로 데려왔다는 이야길 들었다. 도망갈 곳도 없고 중국어를 모르는 여자들을 데려와 집에 가둬두고 억지로 일을 시킨다는 이야기였다.

마음이 아팠지만 김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김씨는 그저 이 모든 것을 가슴에 묻고 중국을 떠났다. 그리고 지난 2009년 4월, 김씨는 몽골을 거쳐 딸과 함께 한국으로 입국했다.

“내게 희망이 올까요?”

한국에 도착한 김씨가 느낀 것은 기쁨이 아닌 공허함과 분노였다. 자신의 삶이 너무나도 비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륙에서 큰 딸을 잃어 생사도 모른 상태로 몇 해가 흐르고, 그 와중에 남편도 잃고 말았다. 또한 먹고 살기 위해 옷을 벗어가며 남성들을 유혹했던 기억이 김씨를 괴롭혔다.

손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사랑하는 사람을 둘이나 잃었다는 무력감과 먹고 살기위해 옷을 벗어야 했던 수치심에 김씨는 큰 고통에 시달렸고 결국 극심한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

한번 찾아온 우울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삶에 대한 회의가 느껴졌고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긍정적이고 즐거운 생각을 가져야 하지만 김씨의 삶에 희망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절망 속에서 하루를 보내던 김씨는 어느 날 우연히 탈북여성을 돕는 기관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의 도움으로 우울증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워낙 심한 우울증이라 금세 완치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김씨는 차츰 병세가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삶에 대한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이제는 18살이 된 작은 딸의 존재가 삶의 큰 이유로 다가왔다. 그렇게 김씨는 삶에 대한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김씨는 요즘도 우울증 치료를 위해 일주일에 두 번 병원을 찾는다. 그리고 삶의 이유를 하나씩 채워가며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소박한 희망을 꿈꾸고 있다.

“병이 다 나으면 일을 해야죠. 그래서 딸을 공부시키고 대학에도 보낼 겁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큰 딸의 생사를 모르지만, 언젠가 그 애가 한국으로 찾아온다면 우리 가족이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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