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규제에 가로막힌 혜택… 中企 ‘키리스테고멘’ 모순 개선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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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규제에 가로막힌 혜택… 中企 ‘키리스테고멘’ 모순 개선해야
  • 이용 기자
  • 승인 2024.01.23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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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 이용 기자  |  일본 에도 시대, 조선으로치면 양반 계급인 무사에게는 ‘키리스테고멘(切捨御免)’이라는 권한이 있었다. 하층민이 무례하게 굴었을 때, 무사가 평소 휴대하던 칼을 뽑아 그자리에서 죽여도 처벌을 면할 수 있는 특혜다. 마땅한 권한이 없던 무사들에게 백성을 통제하고 명예를 지킬 수단을 준 것이다.

언뜻 보기엔 권력자가 하층민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잔인한 특권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이 권한을 활용한 무사는 거의 없었다. 일단 에도 성내에서는 아무리 지체높은 무사라도 칼을 뽑으면 사형이 선고되는 규제가 있었다. 또 즉결처분에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는지 재판도 받아야했다.

권한을 행사하기엔 워낙 많은 제약이 따르다보니, 무사들은 혹시라도 모를 백성과의 마찰을 우려해 오히려 그들을 피해다니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한술 더 떠, 일부 하층민들은 키리스테고멘의 허점을 악용해 무사들을 농락하기도 했다. 무사가 칼을 뽑지 못할 것을 알기에, 일부러 무례하게 굴며 담력을 시험하는 ‘놀이’를 하기도 했다고.

오늘날 한국 중소기업계에서도 규제가 혜택을 가로막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진다. 중소기업에 특화된 지원 제도는 어느 정권에서나 있던 일이다. 대개 연구개발 환경을 개선해주고, 수출을 독려하고, 일부 세금부담을 덜어주고, 산업 인재를 투입하겠단 내용이다.

이런 대대적인 지원과 혜택에도 불구하고, 정작 중소기업들은 성장할수록 마주하는 규제 때문에 성장을 꺼리는 상황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10년 내 중소기업을 졸업한 국내 중견기업 300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0곳 중 7곳이 중소기업 딱지를 벗자 각종 조세 및 규제 부담을 안게 됐다고 답했다. 심지어 정책 수혜를 받기 위해 오히려 중소기업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응답도 30.7%가 나왔다.

중소기업계를 괴롭히는 대표적인 규제는 과도한 상속세법이다. 상속을 부의 세습으로 보고, 징벌적 과세를 부과하는 세법은 업계가 꼽은 대표적인 악법이다. 기업이 커 갈수록 과도한 상속세가 따르는 만큼, 중소기업들은 사업 확대를 억제해 스스로 경쟁력을 소실하는 판국이다. 실제로 국내외서 유명세를 떨친 강소기업들이 과도한 상속세로 무너지는 사례가 발생한 바 있다.

상속세의 취지가 ‘부의 배분’인데, 거둬들인 세금이 과연 얼마나 국민들에게 돌아가는지 알기 힘들다는 점도 문제다. 중소기업이 망하지 않고 커 갈수록 세금도 많이 걷히기 마련인데, 상속세 때문에 무너져 버리면 그 기회마저 사라지는 꼴이다.

모순된 규제는 결국 기업이 편법을 동원하게 만든다. 에도 시대엔 무사계급이 한밤중에 남몰래 백성을 베어버리는 ‘츠지기리’가 성행했다. 칼의 성능을 시험해보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하층민에게 모욕을 당한 무사가 법을 피해 몰래 찾아가 죽이는 사례도 많았다.

기업들 역시 노동 규제를 피하기 위해 △퇴직금을 주지 않아도 되는 시점까지 계약 직원을 고용하거나 △중대재해처벌법을 피하기 위해 하청에 하청을 주는 편법을 활용한다. 또 일부는 과도한 조세부담을 피하기 위해 불법 창구 및 비자금을 조성한다.

국내 산업계는 과도한 규제 탓에 발전보다 생존에 집착하게 됐다. 정부가 중소기업계에 퍼다주는 혜택과 권한은 그저 어항 물이 썩지 않게 해주는 여과장치일 뿐이다. 어항이라는 규제에 갇혀 있다면 국내 산업계는 그저 현상만 유지하려 할 뿐이다. 국내 기업들이 어항을 넘어 바다로 나갈 수 있도록 실질적 규제 해소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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