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김정은, 선대 '유훈(遺訓)'마저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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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김정은, 선대 '유훈(遺訓)'마저 내던졌다
  • 조석근
  • 승인 2024.01.18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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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근 정경부장
조석근 정경부장

관광객들은 오전 7시까지 도라산 출입국 사무소에 집결했다. 비용은 성인과 초중고생이 동일한 18만원. 바로 개성행 당일 패키지 여행이다. 북한 안내원을 실은 버스는 관광객들을 고려의 500년 궁궐터가 있던 만월대로, 희대의 명기 황진이를 기억하는 박연폭포로, 정몽주의 이루지 못한 꿈을 품은 선죽교로 데려갔다. 그리고 관음사로, 숭양서원으로···.

그런 시절이 있었다. 벌써 16년 전이다. 그 시절 금강산관광이 건재했고 그 후속 사업으로 개성 패키지 관광도 이용할 수 있었다. 2007년 12월부터 2008년 11월까지 1년간, 10만명이 다녀갔다. 남북 당국은 김포공항과 삼지연공항 사이 직항로를 개설하고 있었다. 백두산 관광을 위한 인프라 구축 차원이다. 평양은 남한 관광객을 위해 단체 골프관광과 여행상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아가 자유로운 통행을 위해 개성 이북, 평양까지 도로를 정비했다. 마치 거짓말처럼, 아주 오래된 옛날 얘기처럼, 잊혀간 기억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15일 최고인민회의에서 대한민국을 '제1적대국'으로 명시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수도 평양의 남쪽 관문에 꼴불견으로 서있는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을 철거하라" 그리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민족경제협력국, 금강산국제관광국 등 남북 교류협력 기구들의 전면 폐지를 주문했다. 경의선을 포함한 남북을 연결할 인프라는 모두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파기할 것을 덧붙였다.

김정은이 언급한 조국통일 3대 헌장. 그 중에서도 제1헌장은 1972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사이에 발표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란 통일 원칙이다. 우리 표현으로 7·4 남북공동성명이다. 분단 이후 남북 최초의 합의문이다. 김정은은 바로 할아버지 김일성의 '유훈'을 버린 것이다. 아버지 김정일이 이어온 남북교류 사업과 그 기본 원칙에 대한 '유훈'을 버린 것이다. 남북 사이의 모든 합의가 이제 무효라는 결단을 내렸다는 뜻이다.

7·4 공동성명 이후 1991년 노태우 정부는 남북 기본합의서를 발표했다.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통한 6·15 공동선언과 두번째 정상회담의 10·4 선언은 그 충실한 이행이다. 문재인 정부는 10년 가까이 끊어진 남북 대화, 교류협력을 극적으로 되살렸다. 그러나 권위주의 독재 시절부터 이어진 역대 정부의 노력은 이제, 그 의미를, 거의 상실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김정은의 이런 선언에 대해 "북한이 도발에 나설 경우 강력히 응징할 것", "가짜 평화는 우리 안보를 더 큰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는 기존 입장만을 반복했다. 현 정부에게 북한은 그저 몰락해야 할 적국이다. 남북관계는 1972년 이전으로 돌아갔다. 남북 사이엔 마치 정전체결 직후처럼 적대감만 남았다. 불과 집권 2년이 채 지나기도 전의 ‘성과’다. 축하해야 하나.

이제는 대통령 본인을 포함, 대통령실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대화, 교류협력을 위한 수많은 노력이 가짜 평화였다면 '진짜 평화'는 무엇인가. 아니 대통령실이 말하는 '평화'란 무엇인가.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인가. 도달할 가능성이란 있긴 한 것인가. 남북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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