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갚은 사람만 바보”…도덕적 해이 논란 키운 ‘총선용 금융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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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갚은 사람만 바보”…도덕적 해이 논란 키운 ‘총선용 금융정책’
  • 이광표 기자
  • 승인 2024.01.15 14: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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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 "장기연체 억제 효과"...성실 차주들만 '박탈감'
도덕적 해이 우려에 "예외적 지원, 상시 정책 아냐"
이복현 금감원장이 지난 11일 열린 서민·소상공인에게 힘이 되는 신용사면 민·당·정 협의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국민의힘 유의동 정책위의장, 김주현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감원장. 사진=연합뉴스
이복현 금감원장이 지난 11일 열린 서민·소상공인에게 힘이 되는 신용사면 민·당·정 협의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국민의힘 유의동 정책위의장, 김주현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감원장. 사진=연합뉴스

매일일보 = 이광표 기자  |  금융당국과 금융권이 함께 서민과 소상공인 290만명의 대출 연체기록을 삭제하는 이른바 '신용 대사면'을 본격 추진한다. 코로나19 이후 고금리·고물가가 지속되면서 불가피한 대출 연체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15일 금융위원회와 금감원의 주최로 금융업권이 모여 이같은 내용이 담긴 협약식을 개최했는데, 지난 11일 당정이 발표한 ‘서민·소상공인에게 힘이 되는 신용사면’ 방안을 발표한 뒤 불과 나흘만의 발 빠른 행보다.

앞서 당정이 발표한 신용사면 방안에 따르면 이번 정책 대상자는 2021년 9월부터 올해 1월까지 2000만원 이하 연체자 중에서 연체채무를 전액 상환한 사람이다. 연체가 남아 있더라도 올해 5월말까지 전액 상환할 경우 혜택을 받는다. 정부와 여당이 예상하는 대상자 규모는 290만명으로 △2000년 1월 32만명 △20001년 5월 102만명 △2021년 8월 228만명 등 앞서 있었던 세 번의 신용사면 규모를 훌쩍 뛰어 넘는다.

통상 대출을 3개월 이상 연체할 경우 신용정보원이 최장 1년간 연체 기록을 보존하면서 금융기관과 신용평가회사(CB)에 이를 공유한다. 금액에 따라 길게는 5년까지 금융거래 제한을 받는다. 이에 따라 코로나19 당시 어려움으로 연체 기록이 생긴 이들도 카드 사용과 대출 이용에 불이익을 받아왔다. 당정은 사실상의 사면 조치를 통해 이들의 재기를 돕겠다는 것이고, 이날 금융권 협약식을 통해 발 빠르게 시행에 나서기로 한 셈이다.

다만 일각에선 신용 사면으로 인한 도덕적 해이 우려와 함께 총선을 앞둔 포퓰리즘 정책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차주들이 ‘보릿고개’를 잘 넘게 해주자는 차원에서 신용사면을 결정했다는 입장이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코로나19 때는 차주들의 도덕성의 문제보다는 본인이 예측 통제하기 어려운 이유로 연체한 경우가 많았다”며 “수출이 회복되고 있고, 경기도 좋아지는데다가 금리도 낮아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 사이클에 올라타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 금감원이 과거 사면 효과 살펴본 결과 신용평점 상승으로 카드발급 등 금융 접근성은 개선되고, 사면 받은 차주의 장기연체 발생율이 비(比)사면 차주 대비 1.1%포인트 낮게 분석됐다”며 “신용사면은 장기 연체 발생 억제 효과도 있는 등 긍정적 효과도 상당한 것 확인됐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이 긍정효과에 주목한 데 반해 전문가들은 신용사면 정책을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며 부정적 시각이 주를 이룬다. 부실 차주들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고, 신용평가 기반의 대출 시스템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연체자들 사이에서 ‘경기 어렵고 금리 높으면 신용사면을 또 해주겠지’라는 믿음이 확산될 수 있다”며 “이 같은 기류로 인해 대출자의 도덕적 해이가 심화된다면 금융 시장의 질서를 저해하는 안 좋은 선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소비자들 사이에서도 이번 신용사면에 대해 빚을 제때 갚아온 대출자에 대한 역차별이란 지적이 나온다. 취약계층의 경제 부담을 덜어줄 수는 있겠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연체를 남기지 않으려 노력해온 이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서민금융의 핵심은 결국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게 만드는 것인데, 신용사면은 대출을 이미 받은 사람들이 대출로 문제해결을 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며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한적으로 이뤄져야 하고, 소득 지원대책 등이 함께 수반돼 진행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각에서는 총선을 앞두고 정부와 여당이 선심성 정책을 내놓은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실제로 윤석열 정부는 이전 정부의 포퓰리즘 정책을 줄곧 비판해왔는데 최근 정책 기조를 보면 그와 다를 것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안전진단조차 없는 재건축 허용, 글로벌 룰에 어긋나는 주식 공매도 금지, 대주주 주식 양도세 완화,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추진, 연 4%가 넘는 이자에 대한 은행들의 2조원대 캐시백 등 경제주체들의 도덕적해이를 부추기는 정책들이 잇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정부는 신용사면 논의의 경우 수개월 이상 숙고를 거쳐 나왔다는 입장이다.  전요섭 금융위 금융혁신기획단장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채무불이행자가 증가하고 폐업자가 증가하는 상황을 보면서 내부 검토가 있었다"며 "갑자기 툭 튀어나온 정책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진 단장은 이어 "물론 도덕적 해이 우려가 발생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지원책이다"라며 "신용사면이 상시적으로 시행된다면 도덕적 해이 문제가 발생하겠지만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또다른 금융당국 관계자도 "형평성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코로나19 상황이 지난 지원 이후에도 지속됐고 3고 위기 등으로 불가피하게 연체하는 이들이 더 많아지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이렇게 불가피하게 연체한 채무자를 빠르게 정상적인 경제활동으로 복귀시키는 것이 우리 사회의 건전한 회복에도 도움이 된다는 취지"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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