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故신격호를 평생 괴롭혔던 친일기업 꼬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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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故신격호를 평생 괴롭혔던 친일기업 꼬리표
  • 이승익 기자
  • 승인 2020.01.27 1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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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익 유통중기부장
이승익 유통중기부장

[매일일보 이승익 기자] 베르테르와 샤롯데를 사랑하며 문학가를 꿈꿨던 청년 신격호. 지난 22일 글로벌 롯데신화를 일으킨 신격호 회장이 99세의 나이로 우리곁을 떠났다. 그는 “언제까지나 외국인들에게 고궁만 보여줄 순 없다” 며 영원한 청년정신으로 구순의 나이임에도 롯데타워 현장을 지휘했다. 결국 신회장은 대한민국의 가장 높은 자존심을 짓고 더 높은 곳으로 영면에 들었다.

1922년 울산에서 10남매의 맏이로 태어난 신회장은 가난한 삶을 떨치기 위해 단돈 83엔을 들고 무작장 일본행 배에 몸을 실었다. 경비가 삼엄했던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인이 일본에 오는 것을 곱게 보지 않았기에 신회장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차별적인 고문을 당했다. 

1979년 일본 작가 후지이 이사무가 지은 <롯데의비밀>에서 연이은 고문에 만신창이가 된 이후 조사실 밝으로 내던져진 신격호는  ‘두고봐라. 니들이 짓밟고 무시한 나, 신격호 반드시 성공한다’라는 각오를 다짐했다. 그 경험 때문인지 이후로 신회장은 일본에 적극적인 귀화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피붙이 하나 없었던 신격호는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일본에서 새벽 우유배달을 시작했다. 어렵게 경제적 자립을 해나가던 무렵 일본 강제징병을 피해가기 위해 지금의 와세다 대학의 전신인 와세다고등공업학교 야간부 화학공업과를 진학한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향후 사업을 하는데 밑받침이 된 계기가 됐다.

1942년 평소 부지런했던 청년 신격호를 눈여겨 봤던 일본인 사업가 하나미쓰씨는 사업 제안을 하게 된다. 신격호는 일본인 노사업가에게 그렇게 6만엔을 빌려 선박용 커팅오일 공장을 차리며 첫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3년뒤 2차대전 종지부를 찍는 미국의 원자탄 폭격에 신회장의 공장도 피해가진 못했다. 그렇게 신회장은 빚더미에 앉은 첫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해방이 되도 신격호는 자신을 믿고 투자해줬던 일본인들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오는 귀환선에 올라타지 않았다. 청년 신격호는 빚을 다 갚고 성공해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이후 우연찮게 친구에게 껌을 건네받은 신격호는 껌의 식감과 달콤한 향기를 잊지 못해 껌사업을 시작한다. 당시 껌은 큰 자본 필요없이 가내수공업으로 만들 수 있는 소자본 사업 아이템이었다. 당시 전후 일본에서도 400개의 껌을 만드는 기업이 있었다고 하니 요즘 시대 말하는 ‘레드오션’시장이었다.

그러나 신격호는 여느 회사와는 다르게 특유의 사업전략인 품질로 승부수를 던졌다. 껌에 멕시코산 사포딜라 나무에서 나온 천연 치클과 송진 그리고 사카린을 넣어 가마솥에 넣은뒤 국수 뽑는 기계로 대량 껌을 생산했다. 1954년 그렇게 롯데껌 스피아민트가 탄생하며 한국인 신격호의 일본 롯데 신화는 시작됐다. 롯데는 평소 ‘젋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주인공의 연인 샤롯데를 떠올렸다. 모든이의 사랑을 받는 샤롯데처럼 ‘샤’를 빼고 ‘롯데’를 기업의 사명으로 지었다.

당시 껌사업으로 승승장구했던 롯데는 경쟁사인 일본 하리스껌의 엄청난 비방과 방해에 시달렸다. 하리스는 롯데가 2등국민인 조선인이라고 비방을 하며 일본 제과업계를 무너트리려 한다는 루머도 퍼트릴 정도라 하니 일본 사업의 길은 그야말로 험난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격호는 모든 허들을 뛰어넘고 일본 최고의 제과기업으로 성장했다.

1965년 박정희 시절 한일협정 체결이후 외국자본이 절실히 필요했던 대한민국 정부의 부름을 받은 신격호는 기업보국의 마음으로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일본에서 번 돈의 2.5배를 한국에 투자했다. 당초 신격호는 철강사업을 하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여 후지제철의 도움을 받고 제철소 사업 계획과 설계 도면을 준비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해 시작하려 했던 제철사업은 정부가 철강업을 국유화(지금의 ‘포스코’)하기로 하면서 꿈을 접고 그는 애국의 마음으로 모든 자료를 정부에 흔쾌히 넘기게 됐다.  그렇게 철강왕 박태준도 탄생하게 되는데 큰 밑거름이 됐다는 사실을 지금 우리들은 잘 알지 못한다.

이후 본인의 가장 주특기인 제과사업으로 한국에서도 대박을 치며 유통·관광·석유화학 분야로 사업을 넓히게 됐고 재계 5위의 롯데 왕국을 완성시켰다. 컬러 티비가 보급화 되던 시절 롯데는 당시 ‘미스코리아’선발대회와 쌍벽을 이룬 ‘미스롯데’ 미인대회도 열며 1977년 서미경씨를 비롯해 채시라,이미연 등 당대 최고의 미녀 스타들을 배출했다.

최근 롯데가 자산 115조원에 달하는 그룹이 된 원동력은 신격호의 남다른 상상력과 불도저같은 추진력이었다. 그는 관광산업이 전혀 개발되지 않았던 1973년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에 버금가는 금액을 투자해 롯데호텔을 지었다. 1984년 허허벌판이던 잠실에 실내 테마파크인 롯데월드사업을 추진했다. 2010년에는 아파트를 짓는 게 수익에 좋다는 의견을 물리치고 123층짜리 롯데월드타워를 지으며 아시아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랜드마크도 지었다. 

하지만 최근 5년간 롯데에게 온 시련은 너무나 가혹했다. 박근혜 정부시절 성주의 사드배치로 인해 중국의 보복앞에 수조원대의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했고 최근 한일경제 전쟁으로 일본,한국 모두에게 버림받는 기업이 됐다. 뿐만 아니라, 엎친데 덮친격으로 '형제의 난'까지 더해지며 사법당국의 험난한 수사와 재판의 과정을 겪고 최근에서야 마무리가 됐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늘 따라 붙었던 ‘쪽바리 기업’ 롯데의 이미지는 신동빈,신동주 회장의 어눌한 한국말 인터뷰에서 국민의 어긋난 애국의 분노가 극에 달하게 했다. 이로인해 서민의 술인 ‘처음처럼’을 비롯해 각종 롯데 관련 불매운동까지 이어지게 했으니 롯데 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필자가 장황하게 신격호의 삶을 재조명하며 장문의 칼럼을 쓰는 이유는 적어도 애국자였던 신격호와 롯데그룹에 대해서 국민의 오래된 오해를 벗겨주고 싶은 마음이다. 롯데의 계열사가 100개가 넘고 직원과 거래처, 그리고 주변에 롯데로 인해 먹고 사는 소상공인들까지 합치면 대한민국 국민의 몇백만명이 수혜를 입고 산다. 그리고 롯데그룹 전체가 국가에 내는 세금은 가희 천문학적인 숫자다. 

그런데 우리는 롯데를 두고 지주회사가 일본에 있는 광윤사라는 이유만으로 아직도 친일기업이라며 비난을 한다. 그러나 지난 한일협정 당시 일본의 광윤사를 통해 일본의 외환자금관리법에 따라 해외현지법인 출자 절차를 밟아 일본내에 있는 많은 돈이 대한민국으로 들어오는 창구의 역할을 했을 뿐 현재까지 배당을 통해 일본으로 자금을 빼가거나 오너 일가를 위한 해외 페이퍼컴퍼니 용도로 활용된 법인이 아니다.

필자는 신격호의 무한한 프런티어 정신을 통해 요즘의 갈 곳 잃은 한국경제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램이다. 대한민국은 기업과 기업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반기업 정서’도 이젠 정말 과하다. 정부가 만든 각종 규제도 불확실성을 키우며 기업가 정신을 약화시키고 있다. 한국에서는 기업의 대표이사가 되는 순간 수백가지 이유로 자칫하면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그래서 한국은 ‘기업하기 가장 어려운 나라’로 꼽힌다.

물론 신이 아닌 이상 신격호에 대해 모든 것을 존경하자는 뜻은 아니다. 그도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기에 말년에 자식들 경영권 싸움도 겪었다. 벌었던 부에 비해 근검절약이 몸에 배었던 신격호에게 ‘짠돌이’회장이라는 이미지도 그를 평생 따라 다녔다. 하지만 이러한 소소한 과를 두고 앞서 말한 그의 공까지 폄훼해서는 안된다. 

해외 출장 중이어서 직접 참석하지 못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사회자가 대독한 추도문에서 “창업주께서는 우리나라가 전쟁의 폐허 위에서 국가 재건을 위해 몸부림치던 시절 조국의 부름을 받고 경제 부흥과 산업 발전에 흔쾌히 나섰다”며 “대한민국 경제 발전을 견인했던 거목, 우리 삶이 어두웠던 시절 경제 성장의 앞날을 밝혀주었던 큰 별이었다”고 밝혔다.  

지난 22일 신격호의 빈소에는 고인이 1978년 박정희 정부로부터 받은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놓여있었다. 이미 30년 전 박정희 대통령은 기업보국 이념을 몸소 실천하며 한국경제의 주춧돌로 신격호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훈장으로 전한 것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롯데에 대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던 ‘친일기업’의 꼬리표를 떼어줘야 한다. 존경과 사랑까지는 못줄 지언정 고인과 그의 가족, 그리고 롯데그룹에 대한 오명만큼은 벗겨줘야 하는 것이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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