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여인천하(女人天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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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여인천하(女人天下)
  • 송병형 기자
  • 승인 2019.10.23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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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형 정경부장
송병형 정경부장

#1. 영화 ‘왕과 나’로 유명세를 탔던 태국 왕실의 사랑 이야기가 다시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다만 이번에는 로맨스 뮤지컬이 아닌 정치 드라마다. 태국 왕실 역사 100년 만에 처음으로 ‘왕의 배우자’ 칭호를 얻은 시니낫이 왕에게 반항하고 왕비의 자리를 넘보다 석 달 만에 모든 지위를 박탈당했다는 결말이다. 왕실 모독을 이유로 ‘왕과 나’의 태국 내 상영을 금지했던 태국 왕실은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국영방송을 통해 왕실의 치부를 드러냈다. “시니낫은 은혜를 모르고 지위에 맞지 않게 행동했다. 왕비의 지위에 오르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치 조선 명종 때 여인들의 궁중 암투극을 그린 TV 드라마 ‘여인천하’를 방불케 한다. 어린 왕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던 ‘철의 여인’ 문정왕후 시대, 동생 윤원형은 척신정치의 대명사가 됐다. 기생 출신의 정난정은 그의 총애를 받아 정실을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했으며 정경부인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하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2. 드라마 여인천하는 사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풍자극이다. 월탄 박종화는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 등 여인네들에 의해 국정이 농단당하는 현실을 명종의 치세에 빗대 소설 ‘여인천하’에 담았다. 박마리아는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환심을 사 남편을 정계에 데뷔시켰다. 이기붕은 대통령 비서실장, 서울시장, 자유당 의장 등 출세가도를 달렸고, 박마리아 역시 이화여대 부총장, YWCA 회장 등을 지내며 여성 명사가 됐다. 하지만 남편을 권력 2인자의 자리에 올리려다 4.19 혁명을 부르고 말았다. 박마리아의 권력욕은 가족 전체를 비극으로 몰았다. 혁명이 터지자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입적된 장남 이강석은 가족 모두를 총으로 쏜 뒤 자신 또한 자살했다. 헌정사의 시작을 오점으로 물들인 1공화국의 비극은 여인천하에서 비롯됐다.

#3.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박마리아 일가족의 비극 이후 반세기가 지나 여인천하 국정농단 드라마가 다시 펼쳐졌다. 박근혜 정부에서 종횡무진했던 최서원(최순실)은 최근에야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보낸 옥중서신에서 “이 편지가 아마도 이 생의 마지막일지도 모르고 다시 보는 날이 없을 것 같아 글을 드린다”며 “지금 생각하면 대통령 취임 전에 제가 일찍 곁을 떠났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고 훌륭한 대통령으로 국민들 마음에 남았을 텐데, 죄스럽고 한탄스럽다”고 했다. 또 “주변에 나쁜 악연들을 만나 대통령님에게까지 죄를 씌워드리게 되어 하루하루가 고통과 괴로움 뿐”이라며 “이 생이 끝나는 날까지 가슴 깊이 내내 사죄드린다”고 했다.

#4. 또 다른 최서원은 등장하지 않을까. 국정농단 심판을 전면에 내걸고 탄생한 현 정부에서도 잡음이 끊이질 않는 걸 보면 언젠가 제2의 최서원이 등장할지 모르겠다. 촛불정신의 상징이라던 조국의 아내 정경심은 권력의 정점에 선 듯한 행태를 보인다. 검찰에서는 ‘황제 조사’를 받고, 직장에서는 ‘언터처블’이다. 검찰의 기소에도 직위해체가 아닌 무급휴직으로 결론 내린 동양대 회의 결과를 두고 “조국이 대통령 다음 아니냐는 분위기여서 그냥 흐르는 대로 가자고 결론 내린 것”(조선일보)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여풍(女風)은 청와대 내에서도 거세다. 김정숙 여사는 최근 공무원들을 청와대로 불러 노고를 치하했다고 한다. 김 여사는 지난 6월에도 대기업 CEO들을 청와대로 불러 “영부인이 스스로를 대통령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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