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想] 최순실·박근혜보다 김무성 같은 '복박'이 더 나쁘다

부역자와 방관자 그리고 원죄

2016-11-06     김경탁 기자

[매일일보] 개인적으로, 구약성경에서 가장 마음에 안드는 부분 중 하나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서 원죄가 시작됐다는 내용이다.

판단력과 자기 절제력이 부족한 어린아이 앞에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보여주면서 ‘너 이거 먹으면 안 돼’라고만 말한 뒤, 관리하지 않고 방치한 사람이 나중에 아이가 그 음식에 손을 댔다고 집에서 쫓아내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지 늘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유사한 구조의 그리스신화 ‘판도라상자’ 에피소드에 함정을 판 ‘신’의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과 달리 ‘선악과’ 이야기는 마치 구조를 세팅한 신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고 신의 명령을 어긴 인간에게 모든 잘못이 있다는 듯 묘사되어있어 더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요즘 계속 머릿속에 선악과 이야기가 떠오른 이유는 56년 만의 ‘대통령 하야’라는 헌정중단 사태가 가시화된 지금의 국가적 비극의 책임을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 두 사람에게 모두 지우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 의문이 들어서다.

최씨는 그저 탐욕이라는 ‘본능’에 충실하게 최대한의 사적 영달을 추구한 한 개인일 뿐이고, 박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된 ‘최태민-최순실 부녀에게 휘둘리는 삶’을 국가수반이 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왔을 뿐이지 않은가 말이다.

필자가 ‘최태민’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정치부 근무 경험이 전무했던 10여년 전의 일이다. 당시는 박근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의 ‘수첩공주’라는 별명 뒤에 최씨 부녀가 있으리라고 상상조차 못했지만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이미 그 관계가 잘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4선 국회의원과 2번의 거대정당 대표직 수행을 거치면서 박 대통령의 지적·정서적·영적 문제점 그리고 모든 사안에서 최순실씨에게 휘둘린다는 사실은 이미 당 내외에 공공연한 ‘비밀’이었다는 말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미혹한 박 대통령이나 탐욕스러운 최씨보다 지금의 국가적 불행에 대해 더 큰 책임을 물어야할 대상은 바로 박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들이라고 본다. 허수아비를 국가수반으로 세워놓고 뒤에서 자기들의 사적 이익을 챙긴 것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중고교 교과과정 이상의 조금만 복잡한 이야기가 나와도 대화의 맥을 쉽게 놓치고, 일상적·정치적 대화조차 ‘무녀’로 의심받는 오랜 친구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불가능할 정도의 참담한 지적 능력과 취약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국가수반에 올린 저의는 무엇이었겠나.

예를 들어,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은 2012년 대선 당시 ‘복박’으로 불렸다. ‘원조친박’에서 ‘탈박’을 거쳐 ‘돌아온 친박’이라는 의미다. 그는 지난 총선 공천 과정에 당 대표로서 자기 권한을 행사하다가 다시 ‘탈박’이 됐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을 만들겠다”며 ‘복박’이 된 김 전 대표는 최씨와 박 대통령의 관계를 과연 몰랐을까. 그는 최씨와 박 대통령의 관계를 끊거나 최소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는 국가야 어떻게 되든 내 알바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까.

전여옥 전 의원이 일갈했듯이, ‘친박’이면서 둘의 관계를 몰랐다는 것은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그거 말리려다 밀려났다”는 식의 면피성 발언을 자랑스럽게 하는 사람들도 그리 달갑게 보이지 않는다. 재벌기업들이 ‘우리는 피해자요’하는 것 역시 가증스럽다.

그러나 자기들이 세운 총기 떨어지는 대통령을 비웃고 최씨의 국정농단에 협조·방관하면서 사적 이득을 챙기면서 국기문란을 자행한 ‘적극적 부역자’들과 이들 같은 소극적 동조자 혹은 방관자들은 갈라 볼 필요가 있다.

한 친박 의원은 “우리 모두 죄인”이라면서 새누리당은 물론 정치권 전체에 이번 사태의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던데,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은 ‘아무도 책임질 필요 없다’는 뜻이다. 이는 친일파(‘반민족행위자’로 표현을 바꿔야 한다고 본다) 청산 문제가 거론될 때 ‘일제강점기 당시 한반도에 살았던 민중 대부분이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식의 물타기를 시도하는 것과 비슷한 말이다.

우리는 부역자와 방관자는 엄연히 다르고 부역자에도 ‘급’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부역자는 그 급에 따라 엄정한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하고, 방관자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게 이루어지는 것에서 제대로 된 나라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