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편찬위원회, 조선 무관의 삶을 담은 '국역 노상추일기' 12권 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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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조선 무관의 삶을 담은 '국역 노상추일기' 12권 완간
  • 김종혁 기자
  • 승인 2021.02.09 15: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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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무관 노상추가 67년간 매일 기록한 조선의 일상사
18-19세기 조선의 사회상이 생생하게 담겨, 온라인 열람도 가능
국사편찬위원회 간행(2017~2020) <국역 노상추일기>(전12권, 국역본)
국사편찬위원회 간행(2017~2020) <국역 노상추일기>(전12권, 국역본)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조광)는 조선후기 무관 노상추(1746~1829)의 생활일기를 우리말로 번역한 <국역 노상추일기> 12권을 완간했다.
 
현존 조선시대 일기 중 최장 기간인 67년간의 기록을 담은 <국역 노상추일기>의 완간은 조선후기 양반의 삶과 당시 사회의 실상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국역 노상추일기>는 18~19세기 조선의 사회상을 생생히 보여주는 귀중한 1차 사료이다. 노상추가 1763년(18세)부터 1829년(84세)까지 기록한 일기에는 4대에 걸친 대가족의 희로애락, 각처에서의 관직 생활, 당시 사회의 정황 등 그를 둘러싼 다양한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노상추일기> 원문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노상추일기> 원문

노상추의 일기 곳곳에는 당시 민생을 어렵게 하는 가장 무서운 요인 중의 하나였던 전염병과 관련된 기록이 담겨 있다.

전염병에 대응할 수 있는 의학적 지식이 빈약하고, 개인의 영양 상태와 위생 환경이 열악하였던 전근대 시대 전염병의 위력은 현대인이 경험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을 것이다.

실제 노상추 본인은 물론 가족들과 지인들이 전염병으로 인해 고생을 하거나 목숨을 잃는 사례가 드물지 않게 기록되어 있고, 전국 단위로 기승을 부리는 전염병으로 인한 민생의 도탄에 대한 식자로서의 안타까움과 책임의식이 일기장의 행간을 채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기동(耆洞) 하인이 와서 부고를 바쳤는데, 외종조 고모인 여홍호(呂弘㦿) 정랑(正郞)의 부인께서 어제 오시에 돌림병으로 돌아가셨다. 초상이 돌림병이 돌고 있는 시기에 났기 때문에 형수씨께서 초종(初終)에 맞추어 갈 수 없었다. 나도 우연히 목에 부스럼 병을 앓고 있어서 목을 돌리기 어렵기 때문에 의관을 갖추고 외가에 가서 조문할 수 없으니 슬프고 참담하다.- [1770년 윤5월 10일 일기 번역문]

 무관 노상추는 자신의 일기가 후손들에게 타산지석의 교훈이 되기를 희망하며 삶의 경험과 의례 풍습 절차, 올바른 처신 등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했다. 이로 인해 그의 일기는 조선후기 사회를 다채롭게 조명하는 자료의 보고가 될 수 있었다.

<국역 노상추일기>를 통해 '조선왕조실록'과 같이 정제된 자료에는 기록되지 않은 조선 사회의 실상을 더욱 실감나게 엿볼 수 있다.

조선후기 정치의 비주류인 영남 남인 출신 무관이라는 입장으로 인해 노상추는 당시 문관 중심의 양반 관료 사회를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노상추의 일기장에는 무관을 폄훼하고 영남 출신 남인을 차별하는 주류 양반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비주류로서 마주해야 했던 현실적 한계 속에서도 무관으로서 충절과 애민의식의 실천을 위해 노력했던 노상추의 모습을 통해 조선후기 관료의 명예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 당초에 가산을 받아 각자 살 때에 상속분으로 얻은 것이 논 1섬 9두락, 밭 90여 두락으로 가격으로 치면 500여 냥에 불과하였다. 10년 동안 과거시험을 보러 가기 위해 모두 팔아버리고, 화림(華林)으로 옮긴 뒤에 산 것 역시 과거시험으로 진 빚 때문에 팔았으니 나의 500 여 냥은 모두 과거 보는 데 사용하였다. 그러니 앞으로 굶어 죽을 운수가 아니겠는가. 공명(功名)이란 것이 정말 우습다. - [1782년 5월 7일 일기 번역문]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노상추일기> 일부 원본 표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노상추일기> 일부 원본 표지

조선후기 양반 사회에서 경조사 참여의 중요성

노상추는 일기의 곳곳에서 경조사에 다녀간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피고 관련 상황을 빼곡하게 기록해 두었다. 양반 사회에서 경조사 참여가 대단히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훗날 자손들이 집안을 경영할 때 참고 자료로 삼게 하기 위한 목적도 들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노상추의 일기는 개인의 일기가 아니라 집안 일기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노상추가 무과에 급제해 금의환향한 후 인사차 이곳저곳을 다닐 때 길에서 남의 집 종에게 홍패(과거합격증)를 빼앗기는 일이 있었다. 이를 사주한 주인공은 지역에서 행세를 하던 최충국으로, 노상추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조문을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에 노상추가 일부러 그 집을 들르지 않자 최충국은 자신을 무시했다고 판단하여 홍패를 훔치는 일을 벌인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노상추가 사리로서 최상국을 매섭게 꾸짖고 홍패를 돌려받는 것으로 종결됐다.

아래의 일기 내용에는 조선후기 양반 사회에서 경조사 참여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 상좌원(上佐院)에서 일찍 출발하여 큰길에 나서니 어떤 사람이 목화밭에 엎드려 있다가 갑자기 뛰어나와 함부로 홍패(紅牌)를 빼앗아 달아났다. 그래서 이유를 물으니 기동(耆洞)의 부장(部將) 최충국(崔忠國)이 그의 아들 셋을 시켜 남자 종 하나를 데리고 요로(要路)에서 빼앗게 한 것이었다. 그는 내가 선생을 만나지 않고 가자 쫓아온 것이라고 하였다. 저 남자종이 먼저 달아나므로 할 수 없이 나는 화판(花板)과 창졸(唱卒)을 실은 말을 내버려두고 혼자 말을 타고 바로 최충국에게 달려갔다. 최충국은 일찍이 서로 친분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부친상 중에 있을 때에 그가 편지로 위문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를 방문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헤아리지 않고 내가 새 급제자로서 마을을 지나가면서 자신을 무시해 방문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어 이렇게 망측한 행동을 한 것이다. 내가 이에 면전에서 꾸짖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부친상에 조문도 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지위를 무시했다고 원망하니 크게 체모를 잃은 것 입니다. 주인이 처신하는 태도는 나이가 들었는데도 밝아지지를 않습니다.”고 하니, 최충국은 사과하고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또 말하기를, “홍패는 임금께서 내려주신 것이니 빼앗거나 주는 것을 그대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입니까?”하니, 그가 이에 자기 죄를 한없이 인정하고 홍패를 되돌려 주었다. - [1780년 8월 2일 일기 번역문]

 비주류 무관 노상추가 출세하기까지의 어려움

노상추는 원래 문과를 준비하였으나 23살에 문관의 길을 포기하고 무예를 수련했다. 문관으로 출세하기에는 영남 지방의 남인 가문 출신 비주류라는 한계가 분명했고, 넉넉지 않은 집안의 경제를 이끌어야 할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과로 진로를 변경한 후 1780년 35세의 나이로 급제하기까지 10년의 세월이 더 걸렸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노상추는 10년 고생 끝에 드디어 무과에 급제하였지만 그때부터 4년 동안 관직에 임명되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관직에 나아간 이후에도 말단 무관직을 전전하였다. 이 와중에 1787년에는 ‘갑산진관’이라는 변방 지역의 말단직에 임명됐는데, 이 날 일기에는 세력이 없어 변방을 전전하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한탄이 기록되어 있다.

노상추는 비주류 무관으로서 겪어야 했던 냉대와 차별에도 불구하고 성실히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했고, 그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되었다. 평소 그의 조부 노계정의 훌륭한 행실을 기억하고 있었던 정조가 1792년에 실시된 활쏘기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노상추를 발탁해 정3품 당상(堂上) 선전관(宣傳官)에 임명했던 것이다. 이듬해 노상추는 1793년 삭주부사(朔州府使)가 되었으며, 이후 궁궐 수비를 책임지는 금군장(禁軍將)을 맡는 등 비교적 순탄한 관료생활을 이어갔다.

아래의 일기 내용에는 비주류 무관 노상추가 출세하기까지의 어려움이 기록되어 있다.

 - 당초에 가산을 받아 각자 살 때에 상속분으로 얻은 것이 논 1섬 9두락, 밭 90여 두락으로 가격으로 치면 500여 냥에 불과하였다. 10년 동안 과거시험을 보러 가기 위해 모두 팔아버리고, 화림(華林)으로 옮긴 뒤에 산 것 역시 과거시험으로 진 빚 때문에 팔았으니 나의 500 여 냥은 모두 과거 보는 데 사용하였다. 그러니 앞으로 굶어 죽을 운수가 아니겠는가. 공명(功名)이란 것이 정말 우습다.- [1782년 5월 7일 일기 번역문]

국사편찬위원회 간행(2005~2006) 노상추일기(전4권, 원문 탈초본)
국사편찬위원회 간행(2005~2006) 노상추일기(전4권, 원문 탈초본)

관료로서의 자부심과 올바른 가치관

노상추는 비록 무관을 문관의 하위로 보는 양반 사회의 실태와 영남 출신 남인을 비주류로 차별하는 세태에 대해 높은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임금을 호위하는 무관으로서 충의와 투철한 자부심, 나라를 위한 헌신과 지조, 백성을 위한 사랑에는 문관과 무관의 차이가 없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모범적인 관료 생활을 이어갔다.

국사편찬위원회는 한국사 관련 중요 역사 자료를 발굴해 이를 〈한국사료총서〉(원문)와 〈한국사료총서 번역서〉(국역문)로 간행·보급해 한국사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데 공헌하고 있다.

현존 조선시대 일기 중 최장 기간인 67년간의 기록을 담은 <국역 노상추일기>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사이트에서 원문과 국역문 및 원본 이미지를 손쉽게 열람할 수 있다.

 


좌우명 : 아무리 얇게 저며도 양면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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