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공주 갑사 대웅전', '의성 대곡사 범종루', '순천 팔마비' 보물지정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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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공주 갑사 대웅전', '의성 대곡사 범종루', '순천 팔마비' 보물지정 예고
  • 김종혁 기자
  • 승인 2021.01.26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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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문화재청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공주 갑사 대웅전(公州 甲寺 大雄殿),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의성 대곡사 범종루(義城 大谷寺 梵鍾樓),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순천 팔마비(順天 八馬碑) 등 3건의 문화재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한다고 밝혔다.

공주 갑사 대웅전 사진=문화재청 제공

<공주 갑사 대웅전>은 정유재란 이후 갑사에서 가장 먼저 재건된 건축물 중 하나로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고 현재까지 이어져 오면서 대체로 원형을 유지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대웅전 내부의 ‘갑사소조삼세불(보물 제2076호)’이 1617년에 만들어졌고, 1659년에 '갑사사적비'가 세워지는 과정을 고려하면, 갑사 대웅전의 건립연대는 17세기 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 건축으로서 갑사 대웅전은 전환기 건축의 특징을 지닌다. 정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집의 구성인데, 정면이 5칸이면서 맞배지붕을 한 사례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의성대곡사 범종루 사진=문화재청 제공

<의성 대곡사 범종루>는 '대곡사 창건 전후 사적기'의 기록을 통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병화로 전소되어 17세기 중·후반인 1644년에서 1683년 사이에 중창되었다고 전해진다.

범종루는 정면 3칸, 옆면 3칸의 2층 누각 건물이다. 현존하는 누각 건축 중 17세기 전반의 것은 대부분 3칸 평면을 가지고 있고, 이후 누각 평면이 3칸에서 5칸, 7칸으로 점차 확장되어 가는 경향을 살펴볼 때 범종루는 기존에 남아 있는 누각 건축 중에서도 이른 시기인 17세기 전반의 특징을 가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천 팔마비 사진=문화재청 제공

<순천 팔마비>는 1281년(충렬왕 7년) 이후에 승평부사(昇平府使) 최석(崔碩)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승평부(지금의 순천)에 건립한 비석이다.

최석의 행적과 승평부의 읍민들이 팔마비를 건립한 사실은 [고려사]의 열전(列傳)에 나타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승평부에서는 수령이 교체되면 말 8필을 기증하는 관례가 있었다.  최석은 승평부에서 기증한 말을 타고 비서랑의 관직을 받아 개성으로 떠난 후 자신이 기증받은 말과 자신의 말이 승평부에 있을 때 낳은 망아지까지 돌려보냈다. 이후로 승평부에서는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수령에게 말을 기증하는 폐단이 사라졌고, 읍민들은 최석의 청렴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팔마비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비석은 고려말 처음 건립된 이후 1300년대 초반 쓰러졌으나 다시 세워졌고, 이후 정유년(1597년, 선조 30)의 병란으로 완전하게 훼손됐다가 1616년 부사로 부임해 온 이수광에 의해서 1617년 다시 건립됐고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온전하게 전해졌다.

이수광이 중건한 팔마비의 팔마비(八馬碑) 세 글자는 진사 원진해(元振海)의 글씨이고, 뒷면에 기록된 음기(陰記)는 이수광이 짓고 동지사(同知事) 김현성(金玄成)이 글씨를 썼다.

순천 팔마비는 건립된 이후 중건시기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순천 지역을 대표하는 중요 유물로서의 위상과 13세기에 처음 건립되었다는 역사적 유래가 있고, 1617년에 순천부사 이수광이 중건한 비의 실물이 현전해 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또한 팔마비의 주인공인 최석을 청렴한 지방관의 표상으로 삼아 현재까지 이어온다는 점에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서 역사, 예술, 학술 가치가 충분하다.


좌우명 : 아무리 얇게 저며도 양면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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