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초대석] 우상호 민주당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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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초대석] 우상호 민주당 의원
  • 김영욱 기자
  • 승인 2013.06.09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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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위해 삶의 터전 살맛나게 만들겠다”

▲ 우상호 민주당 의원이 지난 7일 매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의 의정활동 방향을 묻는 질문에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책을 펴고 국회에서 제대로 된 민주진보 정치를 이루겠다”고 답했다.  <사진=이승구 기자>
 
[매일일보] 우상호 민주당 의원은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6월 항쟁 등 민주화 운동의 한가운데에서 활동했던 경력을 지닌 정치인이다.

현재 19대 국회의원으로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 의원을 지난 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나 그의 정치인생과 최근 현안에 대해 들어봤다.

-의정활동을 펼친 지 1년이 지났다. 그간의 활동 평가와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지난 1년을 ‘감사’와 ‘반성’으로 표현하고 싶다. 19대 국회에서 다시 활동할 수 있게 해 준 유권자께 감사하며, 지난 대선에서, 쉽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에 48%의 지지를 보내주신 국민께 감사한다. 19대 국회도 벌써 1년이 지났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으로서 최대의 고비를 맞고 있는 한반도 상황의 진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자 한다.

또한 민주당 혁신의 답을 지역, 마을에서 찾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실제로 지역 당원들의 투표를 통해 ‘골목상권살리기’와 ‘제빵봉사활동’ 의제가 결정이 됐고, 생활정치 모델로 운영하고 있다.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지역모델을 개발하고자 학습도 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문학도를 꿈꾸던 사람이었다고 했다. 어떤 계기로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나.

“학창시절에는 여자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오월문학상, 윤동주문학상도 받으며 시인으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기도 했지만 80년대 우리 시대상황은 나를 학생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학비가 없어 군입대를 해야 했던 내가 군에서 겪었던 우리 사회의 단면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 구조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결국, 학생 신분으로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은 학생운동뿐이라고 생각했고, 제대와 함께 그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1987년 6월이 찾아온 것이다. 학생운동을 통해 사회운동을 했고 사회운동을 통해 얻어진 성과들을 제도권 안으로 수렴하기 위해 고심하게 되면서 결국 현실정치에 참여하게 된 계기다.”

-의원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은 ‘6월 항쟁’이다. 본인은 항쟁의 중심에서 활동했는데 당시 국내 상황과 현장 분위기에 대한 설명과 심정을 들려달라.

“당시 상황은 한 마디로 ‘공포와 분노’다. 희망찬 세상을 상정하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었다기보다는 그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군사정권은 국민의 기본권을 폭력으로 억눌렀고 이에 항의하는 수많은 학생들이 연행됐다.

우리가 당시 주장했던 것들은 기본적인 것들이었다. 자유가 샘물처럼 솟는 세상,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동족을 학살하지 않는 세상,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 등 외국가수 존레논이 <이매진>이라는 노래에서 말했던 그런 세상을 원했다. 많은 국민들은 이에 공감했고 함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박종철 열사는 물고문으로, 이한열 열사는 최루탄으로 죽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분노가 치미는데, 정부는 사건을 축소했고 은폐했다.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생각한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갔다.

거리는 최루탄과 지랄탄으로 희뿌연 연기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콧물, 눈물로 뒤범벅이 됐다. 밤 10시까지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도시에 사람들의 함성은 이어졌다. 지금 와 생각하면 6월 11일은 존재하지 않는 날로 여겼던 것 같다.”

-그동안 민주당 내 학생운동권 출신 의원들인 이른바 ‘486의 대표주자’로 알려졌다. 그런데 최근 ‘진보행동’ 즉 486 정치세력의 해체를 선언했는데 그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다.

“‘486 정치세력’이 2000년 16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젊은 피로 기성 정치권에 진출한 이후 소장파와 당의 주류를 넘나드는 어정쩡한 스탠스로 정치활동을 해왔다.
국민들의 기대는 80년대 민주화란 가치를 위해 희생했던 저들이라면 분명 기성정치와 다른 성과를 이뤄낼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우리는 기존 정치와 정당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단적 노력을 기울이는 데 부족했다. 기존의 정치문법을 배웠고, 기존의 관행을 혁파하는 데 주저했다.

때문에 우리는 냉정히 따져보았고 우리가 당에 무슨 기여를 했는지, 국민 기대 수준의 성공을 했는지를 돌아보며 뼈아픈 반성과 함께 80년대 학생운동의 명망가 그룹의 해체를 결심하게 됐다.”

-최근 북한이 남북회담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회담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개성공단 문제는 먼저 근로자를 철수시키고, 통행을 제한하고, 통신선을 절단한 북한의 잘못이 명백하다. 지난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개성공단은 폐쇄되지 않았다.
이것은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은 정치·군사문제와 연동시키지 않겠다는 남북의 합의가 있던 것인데 개성공단 폐쇄는 북한이 무리수를 둔 것이다.

이것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당국자 대화 제안을 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이유는 남북의 당국자들이 모여 개성공단 문제만 풀자고 만나는 것이 아닌 이산가족 문제도 함께 풀기위해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이 북한은 적극적인 회담 제안을 통해서 작은 명분에 집착하기 보다는 오히려 남북관계가 급진전 되는 전기를 마련하자는 생각을 한 것 같고, 이것을 남한 당국이 토를 안달고 빨리 받은 것은 아주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최근 민주당이 ‘을(乙)을 위한 정당’으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했다. ‘을(乙)을 위한 정당’은 어떤 것인가.

“지난 대선패배 직후부터 지역사회에서의 정당기능에 대해 많은 시도를 하고 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당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우리 삶의 터전을 보다 살맛나게 만드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화려한 미사여구나 이슈가 될 만한 입법도 좋지만, 보다 쉽고 편안한 표현과 캠페인을 통해 민주당이 민생을 챙기고 수권능력을 인정받을 때 비로소 민주당이 ‘을(乙)을 위한 정당’으로 거듭났다고 국민들은 볼 것이다. ”

-박근혜정부가 출범한지 100일이 지났다. 새 정부의 국정운영을 어떻게 보는가.

“인사문제에서 드러나듯이 국민과의 소통, 민주적으로 절차를 거쳐서 협의하고 토론을 통해서 결론을 내리는 리더십, 이런 측면에서는 낙제점을 주고 싶다. 국민들을 혼란시켰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제정책에 있어서는 동반성장이라던가, 대기업의 기존의 관행을 혁파해야 된다고 강조하고 기본적인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나름대로 노력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창조경제라는 애매모호한 개념으로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어내기는 어렵다고 본다. 좀 더 전향적인 중소기업 지원정책을 통해서 신성장산업에 대한 비전을 주려는 노력, 그러니까 특정적인 몇 개의 산업에 집중적인 투자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남북문제에서는 계속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 부분도 조금 더 개선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대담=김영욱 정치팀장 brod7@
정리=이승구 기자 nazirite0@
 
정치인 우상호, 그는 누구인가

 

학생운동가로 6월 항쟁 등 민주화 최일선서 활동
서민·중산층 위한 정책·민주진보정치 실현 노력

민주화 운동의 한가운데서 활동한 학생운동가 출신으로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책을 펴고 국회에서 제대로 된 민주진보 정치 실천을 위해 노력하는 국회의원 우상호.

우 의원은 학창시절 문학도의 꿈을 안고 1981년 연세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대학 시절 제 5공화국의 폭압적인 통치로 인해 억압받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문학청년의 꿈을 잠시 접고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1987년 6월 항쟁의 중심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으며 이후 이한열추모사업회와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전대협동우회 등에서 주요한 직책을 맡기도 했다.

그는 2004년 17대 국회의원으로 여의도에 입성해 국정감사를 통해 예리한 분석과 지적, 대안제시능력으로 시민단체 및 동료의원, 공무원들로부터 최우수 의원으로 선정되었고, 백봉신사상을 2회 연속 수상했다.

또한 그는 문화관광위원회 야당 간사로 언론개혁 입법안을 처리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문화관광위원회 법안심사소위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출판문화산업진흥법’ 개정안, ‘저작권법’ 개정안 등을 처리하기도 했다.

우 의원은 정치활동의 적지않은 기간을 정당과 정치인의 대변인을 맡은 경력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2006년에 열린우리당 대변인을,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대변인, 2008년에는 통합민주당, 2009년에는 민주당 대변인을 역임했다.

18대 총선에서 낙선해 원외 정치인으로 있을 때에도 2011년에는 최문순 강원도지사 후보와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의 대변인을 맡아 활약했다.

제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에는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으로, 제18대 대통령선거에서는 공보단장을 맡아 당시 문재인 대통령후보를 도와 정권교체를 위해 노력했다.

현재는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최근 북한 핵문제와 개성공단 폐쇄 문제로 악화된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펼쳐오고 있다.

◆ 주요약력
▲1962년12월12일 강원도 철원 출생 ▲서울 용문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 ▲도서출판 두리 대표 ▲열린우리당 대변인 ▲민주당 대변인 ▲민주정책연구원 이사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민주통합당 제18대 대통령선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보단장 ▲제17대·19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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