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대 철밥통 양산 그만" vs "근로자 탄압 수단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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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대 철밥통 양산 그만" vs "근로자 탄압 수단될 것" 
  • 이광표 기자
  • 승인 2020.02.16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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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임금정책의 '방점' 된 직무급제...금융권은 도입 전부터 시끌
전문가 "호봉제 지속 어려워" 노조 "합의 없는 추진 결사저지"
기업은행 노조는 윤종원 행장 출근 저지 투쟁을 접으면서 맺은 합의문에 '직무급제 도입 등 임금체계 개편 시 노조 합의 없이 추진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넣었다. 사진=연합뉴스
기업은행 노조는 윤종원 행장 출근 저지 투쟁을 접으면서 맺은 합의문에 '직무급제 도입 등 임금체계 개편 시 노조 합의 없이 추진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넣었다. 사진=연합뉴스

[매일일보 이광표 기자] '직무급제'가 은행권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정부 방침에 따라 국책은행과 금융공공기관이 먼저 직무급제 도입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이에 금융노조를 중심으로 반발 움직임도 커지고 있다. 

직무급제는 이름처럼 직무의 난이도나 책임 정도에 따라 급여를 다르게 책정하는 제도다. 예를 들어 직급이 낮더라도 능력을 인정받아 강도와 난이도가 높은 업무를 맡으면 근속 연수나 직급과 무관하게 더 높은 연봉을 주는 방식이다. 근속 기간에 따라 직위가 상승하고 매년 일정 비율로 연봉 인상이 이뤄지는 호봉제와 상반되는 급여 시스템이다.

다른 의미에선 은행권 안에 공고하게 자리잡았던 '호봉제'의 폐지를 의미한다. 일 안하는 철밥통 양산을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선 필요성이 제기되지만, 사측의 인사권 횡포 수단으로 변질될 거라는 우려도 있다.

◆"억대 연봉자만 30%, 이대로는 안돼"

직무급제 도입 논의의 배경에는 정부의 의지가 깔려있다. 직무급제와 관련한 정부의 입장은 확실하다. 저성장 구조와 인구 고령화 시대를 맞아 호봉제를 직무급제 중심으로 전환하는 게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혁신 과제 중 하나인 임금체계 개편의 핵심 방안이 직무급제 도입이다. 고용노동부는 지난달 '직무·능력 중심 임금체계 확산 지원 방향'을 발표하면서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의 직무급제 도입 지원을 늘리겠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금융권은 국내 주요 산업 중 호봉제 비율이 가장 높은 편이라 직무급제 도입이 확산되면 가장 큰 파장이 예상된다.

2019년 기준으로 금융업의 호봉제 도입 비율을 67.5%에 달하는데 다른 주요 업종은 대부분 50% 밑으로 낮아진 상태다. 대부분의 산업이 업무의 성과와 난이도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연공서열을 깨고 있는데, 금융업만 나홀로 호봉제를 고수하고 있다.

금융권 가운데서도 가장 압박을 받게 될 업권는 은행이 될 전망이다. 증권사들은 업종 특성 상 이미 성과급 시스템이 안착됐다. 일부 보험사들도 선제적으로 직무급제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반면, 은행들은 여전히 대부분 호봉제를 고수하고 있다.

아울러 은행들이 금융권에서 근로자가 가장 많은 근로자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도 도입 논의 과정에서 변수가 될 거로 보인다. 지난해 3분기 말 기준 국내 은행들의 임직원 수는 총 11만9486명으로, 증권사(3만5904명)와 손해보험사(3만4344명), 생명보험사(2만5421명) 등에 비해 훨씬 많다.

이같은 구조를 지켜온 은행들은 어려운 일을 맡거나 성과를 내지 않아도 자리만 지키면 연봉이 차곡차곡 늘다보니 만년 대리, 만년 과장이 넘친다. 굳이 승진을 하거나 중요 보직을 맡지 않아도 억대 연봉을 받을 수 있고, 승진을 포기하고 은행에서 쉬다가 퇴근하는 직원이 적지 않다는 말도 항상 뒤따른다. 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하듯 은행의 억대 연봉자 비율은 2018년 기준으로 30%에 달했다.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문성현 위원장은 "노조 입장에선 임금체계 논의가 거북하고 싫겠지만 시대적 상황을 놓고 보면 피해갈 방법이 없다"며 "이미 물가는 제로베이스다. 성장률은 2%대다. 고령화 시대를 맞았고, 정년연장이 핵심 이슈로 떠올랐다. 높은 임금을 주는 호봉제는 지속하기 어렵다" 했다.

◆임금체계 개편에 발끈한 노동계

문제는 역시 노조의 반발이다. 노조는 직무급제가 궁극적으로 근로자들을 탄압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직무별 임금 산정 기준을 명확하게 나누기 어려워, 결과적으로 사측이 마음에 들지 않는 근로자를 몰아내는 도구가 될 거란 얘기다.

지난 6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선 금융노조 정기전국대의원대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새로 취임한 금융노조 집행부는 2020년 주요 사업계획 중 하나로 직무급제 강제도입 저지를 내세웠다.

같은날 방문규 수출입은행장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직무급제를 도입한 기관이 어느 수준에서 제도를 도입했는지 스터디하고 있다"고 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금융권의 직무급제 도입 논란에 다시 불을 붙인 격이었다. 이에 수출입은행 노조는 사측에 강하게 항의했다. 결국 취임식이 끝나고 방 행장이 금융노조 위원장을 찾아가 노조 협의 없이 직무급제를 도입하지 않겠다고 했다.

최근 윤종원 신임 IBK기업은행장의 낙하산 논란 당시에도 노조는 합의 조건으로 직무급제를 언급했다. 기업은행 노조는 윤 행장에 대한 출근 저지 투쟁을 접으면서 사측과 맺은 합의문에 '직무급제 도입 등 임금체계 개편 시 노조가 반대하면 추진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넣었다.

산업은행 노조도 지난달말 "직무급제 도입을 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조윤승 산업은행 노조위원장은 "직무급제는 성과연봉제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내로남불식 정책"이라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결국 한국수력원자력, 코트라 등 대형 공공기관들이 잇따라 직무급제 도입을 선언하고 있는 와중에 금융권은 공공금융기관들조차 도입이 요원한 상태다.

민간 금융회사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교보생명이 올해부터 직무급제를 시행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현장에선 과거의 호봉제를 유지하고 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성과연봉제도 그렇고 직무급제 역시 정부가 합의 없이 밀어붙일 경우 노동계와의 극심한 대립이 불가피해 보인다"며 "다만 일자리 문제가 심화하고 있어 금융권 내부는 물론 노조들도 국민 여론을 의식하진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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