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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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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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1.20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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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휘규 공학박사(기술경영학)
김휘규 공학박사(기술경영학)

7년 전 구입했던 노트북이 몇 일전 고장이 났다. 갑자기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고치려고 이리저리 알아보니 배터리가 문제였다. 내장형 배터리가 너무 오래 방치되어 결국 전원조차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본체 내장형 배터리다 보니 리필이 어려웠고, 또 연식이 된 제품이라 국내에서 해당 배터리 모듈을 구할 수가 없었다. 열심히 구글링을 해 해외 부속사이트에서 해당 배터리 모듈을 구할 수 있는데 가격이 무려 15만원 이상 든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게다가 배송비용까지 감안해야 하고, 또 내가 직접 노트북을 뜯어서 교체해야 하는데 만만치 않은 작업이 예상됐다.

게다가 요즘은 가벼운 문서작성이나 웹 서핑이 가능한 저가형 노트북이 20만원대이니 15만원이나 주고 배터리를 교체한다는 것이 왠지 불합리해 보였다. 또 7년 전에 50만원 정도 주고 산 물건이니 감가상각조차 다 된 제품이고 굳이 많은 노력을 들여 재생시켜야 하는지 망설여졌다. 하지만 외형만큼은 멀쩡하던 녀석이라 막상 버리려니 많이 망설여졌다. 당시 모델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디자인이 심플했고 배터리 문제만 아니라면 하드디스크도 SDD로 교체해 두어 멀쩡하게 잘 돌아가던 물건이라 애착이 심했다. 게다가 집에 저가형 서브 노트북이 2대나 있어서 당장 해당 노트북을 고쳐서 사용해야 되는 이유는 없었다.

주말 늦게까지 고심하던 중 노트북을 분해하고, 인터넷에서 정보를 조사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컴퓨터를 몇 개나 가지고 생각해봤다.

10년 전에 아버지가 주셨던 노트북, 8년 전에 형이 준 노트북, 외형이 예쁘다는 이유로 4년 전에 구매한 저가 노트북, 마찬가지로 배터리가 오래가고 들고 다니기 좋다는 핑계로 구매했지만 사실은 작고 예뻐서 구매한 또 다른 저가 노트북, 새로운 컴퓨터 체계를 공부하겠다는 핑계로 구매한 크롬북, 최근에는 가지고 있던 데스크탑 컴퓨터를 아버지 드린다는 핑계를 내세웠지만 사실은 고사양 컴퓨터 게임을 하기 위해 구매한 100만 원대 고가 노트북과 이번에 고장 난 노트북까지 무려 7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사실 내가 사용하는 컴퓨터는 최근에 구입한 것이 전부였다. 집에서 컴퓨터를 사용할 일도 거의 없다. 은행 업무, 동영상 감상, 인터넷 검색 등 대부분의 일상을 스마트폰으로 해결하고 있다. 그럼 나는 왜 사용하지도 않는 노트북을 7대나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생각하다 보니, ‘저장강박장애’라는 용어가 생각 났다.

스트레스, 우울증, 불안감, 애정결핍 등의 정신적 영향으로 전두엽에 이상이 생겨 가치를 판단하는 능력과 의사결정 능력이 결여되어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질환이다.

특히 요즘에는 ‘언젠가 사용하겠지’라는 생각에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 사용하지도 않는 각종 데이터를 정리하지 않고 모아두는 ‘디지털저장강박증’도 많다고 한다.

내가 이런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 역시 어느 정도 이런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어릴 때부터 읽지도 않을 책과 전자제품에 대한 애착이 심했던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또 스마트폰에는 언제 저장했는지도 모를 각종 사진과 문서들이 왜 그리도 많은지. 그래서 과감하게 고장난 노트북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스마트폰에서 불필요한 파일들을 삭제했다. 그러고 나니 왠지 청소나 목욕을 했을 때와 같이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불필요한 애착과 미련이 나의 삶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변화와 혁신은 과거에 대한 미련,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는 일, 기존의 일상과 익숙한 것에 대한 결별을 결심하는 것 등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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