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영명고, '해원비(解冤碑)' 건립 7주기 기념식 개최
상태바
공주영명고, '해원비(解冤碑)' 건립 7주기 기념식 개최
  • 이기석 기자
  • 승인 2019.08.16 09: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복 제74주년 및 해원비 건립7주기기념 공주 천안 청소년결의식 개최
광복 제74주년 및 해원비 건립7주기기념 공주천안청소년결의식
광복 제74주년 및 해원비 건립7주기기념 공주천안청소년결의식.사진=매일일보이기석

[매일일보 이기석 기자] 제74회 광복절을 맞이하여 15일 공주 영명고등학교 영명학당에서 제6회 공주학생연대집회 및 해원비 건립 7주기 행사를 거행하였다.

행사는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정립하며 해원비건립 7주기와 3.1운동,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렸다.

또한 ‘한뉘‘와 ’해원비’가 널리 알려져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하루빨리 해결되기를 바란다며 행사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하였다.

행사는 1,2,3부로 진행되었으며, 영명학당에서 국민의례, 애국가제창,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에 대한 묵념으로 시작되었다.

이날 행사을 격려하기 위해서 최훈,김동일도의원과 이창선시부의장,정종순,이성열,오희숙시의원, 공주시 청소년 문화센터 오연욱 소장,소녀상 건립 추진위원들이 참석하여 축하와 격려을 해주었으며, 現유엔 해비타트 한국위원회 회장 박수현 前의원이 영상으로 축하 및 격려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이용환 영명고 교장과 해원비설립에 도움을준 장민호선생님과 교직원, 해원비 건립추진위원회 지도교사인 한왕근 연구소장, 사단법인 한국학진흥원 기획실장 장재영, 천안 쌍용고등학교 학생들과 공주시 청소년운영위원회, 청소년참여위원회, 지역 학생연합동아리 아고스, 푸르미르가 함께 하였다.

해원비 건립7주기 기념 공주천안청소년결의식 참석 학생들.사진=매일일보이기석
해원비 건립7주기 기념 공주천안청소년결의식 참석 학생들.사진=매일일보이기석

이번 행사을 주최한 ‘한뉘’는 순우리말로 ‘한평생’ 이란뜻이며, 작년 5월18일 회장단 선출을 하였고, 4월5일 입단식을 통해 6기임원 8명과 50여명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첫 활동으로는 4월16일 세월호 5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교문 앞에서 추모 편지 쓰기 활동을 통해 학생들의 의식을 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5월18일에는 한마음 축제에 참가해 부스를 운영하여 역사 보드게임 등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심어주기에 앞장 섰다.

앞으로 '한뉘'는 수요집회 참가와 박물관 견학 및 각종 행사에 참여하고 다양한 캠페인을 계획하여 청소년들의 올바른 역사인식을 위한 활동을 더 많이 진행할 예정이며, 이번 행사를 통해 공주&천안 청소년 학술회 MOU를 맺고 지속적으로 연락하여 학술행사를 진행하고, 유관순 열사와 3.1운동을 이어 천안에 해원비를 건립하기 위해 적극 도울 예정이라고 말했다.

공주 영명고등학교에 건립되어 있는 해원비(解冤碑).사진=매일일보 이기석
공주영명고등학교에 건립되어 있는 해원비(解冤碑).사진=매일일보 이기석

해원비는 위안부할머니들의 원통한마음을 풀어자라는 뜻으로"해원비(解冤碑)"로 정했다.고 한다. 또한 해원비 건립당시 공주문화원장이였던 나태주 시인이 직접 비문을 써주어 그 의미을 더하고 있다.

1부 행사 마지막으로 학생들의 마음을 담은 우리의 선언문 낭독 및 제창 순서로 참가자 모두가 제창하며 행사를 마무리 했다. 2부 행사는 해운비 앞으로 이동하여 비문 낭독 및 참가학생들이 준비한 무궁화 나무를 해원비 주변에 심은 후, 3부 행사로 영명학교 정문에 있는 3.1중앙공원에 모여 만세운동을 제창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였다.

해원비 건립초기부터 학생들과 함께한 장민호 선생님은 "2012년에 학생이 주축으로 시작되었던 해원비 건립은 성장하고 있는 젊은 세대들이 우리의 지난 역사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있으며, 일제의 식민지배하에 있던 우리 국민들이 당해야만 했던 그 아픔을 같이 느끼고 있다" 라고 말했다.

올해로 개교 113년째인 영명고등학교는 1905년 샤프 목사가 ‘명설학교’라는 교명을 걸고 학생 몇 명에게 초등학교 교육을 가르친게 시작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시설을 갖추지 못하였고 정부로부터 인가된 학교도 아니었다.

1906년 샤프 목사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공주 지역선교사로 부임한 윌리엄스 목사가 학교를 다시 열었다. 윌리엄스 목사는 교명을 ‘중흥학교’라고 바꾸고, 학생 15명을 모집하여 교육을 재개하고 제도를 정비하는 등 학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09년 7월 26일 ‘영명학교’라는 새로운 교명으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1906년도 영명학교 모습.제공=영명고
초기의 영명학교 모습.제공=영명고

초기에는 지금의 초등학교인 보통과정만을 두었고, 1908년 세 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세 명 중에는 해방 후 초대 충남도지사, 초대 군산해양대학장, 초대 영명중·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황인식이 있었고, 1909년 2회 졸업생에는 광복 후 미군정 때 경무국장이었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영명학교 출신이다.

영명학교 제3회 졸업생 윤창석(尹昌錫)은 3·1운동의 한 계기가 된 동경(東京) 유학생 대표로서 2·8 독립선언을 주도하는 역할을 다하였으며, 3·1운동 때는 교사 김관희의 지도 밑에 김수철·유준석(유관순의 오빠) 등이 주동이 되어 공주 공설시장에서 독립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유관순(柳寬順)을 발탁해서 영명학교에서 잠시 교육시키다가 다시 이화학당(梨花學堂)으로 보낸 연고를 갖고 있다.

1912년 고등과(병설)를 설치하였고, 1916년에는 보통과를 폐지하고 4년제 고등과만을 운영하였다. 영명학교는 공주 지역항일 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1919년 4월 1일에 일어난 공주 읍내 독립 만세 운동은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것이었다. 영명학교 교사 김관희 등 3명과 학생 양재순 등 6명이 주도하여 공주 읍내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영명학교는 1929년의 광주학생항일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영명학교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결의하였고 이로 인해 7명의 학생들이 구속되었으며, 황인식 등 교사 두 명은 선동자로 몰려 구속되었다. 이후 일제는 영명학교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였다. 학교 운영이 어려워지자 윌리엄스 교장은 1932년 영명여학교와 영명학교를 통합하여 영명실수학교로 개편하였다. 이때부터 영명학교는 남녀 공학이 되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에 앞서 한국 내 미국인을 모조리 추방하였는 데, 1940년 윌리엄스 교장이 강제 출국당했고, 1942년에는 적국인이 세운 학교라는 구실로 폐교 조치가 내려지게 되었다. 이로써 영명학교는 1949년 복교될 때까지 만 8년간 교문이 닫힌 채 폐허가 되었다. 영명학교는 폐교될 때까지 36년 동안 533명(남자 313명, 여자 22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힘의 논리가 통용되던 시대는 지나고 민주시민 시대에 접어든 지금에 있어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함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만, 잘못된 사실들에 대한 반성과 용서가 없이는 동행하기 어려움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들의 바람은 큰 것이 아니다. 그저 반성과 용서를 구하는 모습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 부디 일본이 지난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찾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의 지난 역사를 통해 우리가 나아갈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