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국태민안(國泰民安) 가급인족(家給人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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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국태민안(國泰民安) 가급인족(家給人足)
  • 송병형 기자
  • 승인 2019.08.07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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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형 정경부장
송병형 정경부장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 몇 달이 지났을 때다. 당시는 택시 승합이 허용되던 시절이다. 공항 근처에서 택시를 잡았는데 동승자가 중국 여행에서 갓 돌아온 젊은 남성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바로 택시를 잡았는지 여행가방을 안고 있었다.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오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나보다. 택시기사와 승객의 대화가 으레 그렇듯 세태 비판이 시작됐다.

중국이 먼저 도마 위에 올랐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얼마나 씻지 않는지 몸 냄새에 질색했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이제야 숨통이 트인다는 이야기였다. 택시기사는 요즘 돈 벌러 온 중국인들 때문에 동네가 험해졌다고 맞장구를 쳤다. 과거 못살던 시절 서구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들이 떠올라 필자는 끼어들지 않았다.

한참 중국의 후진국 문화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더니 이번엔 물러난 김영삼 대통령이 도마 위에 올랐다. 택시기사와 동승자 할 것 없이 맹비난을 쏟아냈다. 대단한 대통령인줄 알고 지지했는데 알고 보니 경제의 ‘경’자도 모르는 문외한이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었다며 “속았다”고 했다. 젊은 남성은 중국에 있는 동안 애국심이 사무쳤는지 김영삼 대통령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중국인에 대한 공격만큼이나 수위가 높았다. 개인적인 모욕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IMF 외환위기로 인해 민심이 사납던 때였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전임 대통령 욕을 하고 있었으니 이해가 갔다.

다만 필자는 이번에도 끼어들지 않았다. 한국 현대사를 주름잡던 민주화 영웅이 냄새나는 중국인과 동급으로 취급받는 현실이 서글펐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야합이란 비난 속에서 3당 합당을 통해 정권을 거머쥔 한국 현대 정치사 최고의 승부사이기도 했다. 그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고 공언했고, 실제 집권하자마자 단칼에 별 40개를 날려버리며 하나회를 척결했다. 군부 쿠데타의 싹을 잘라버린 과감한 행동이었다. 그는 또 자신부터 재산을 공개하며 권력 부패에 칼날을 들이댔고 금융실명제를 단행하는 등 수 십 년 군부독재의 적폐를 청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국민들은 문민정부의 과감한 개혁작업에 환호했다.

그러나 한때 열렬했던 지지 민심은 불과 몇 년을 못가 싸늘하게 돌아섰다. 후임인 김대중 대통령도 대북 송금으로 결말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김영삼 대통령보다는 나았다. 김영삼 대통령의 여러 업적들은 국가적 환란을 초래한 단 한 가지 과오에 모두 묻히고 말았다.

문민정부 이후 4반세기가 지나 촛불정부가 탄생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김영삼 대통령만큼이나 강력한 적폐청산 의지를 보인다. 또 한반도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겠다는 의지 역시 김대중 대통령만큼이나 강력하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안정된 삶이다. 문재인 정부가 아무리 대단한 역사적 위업을 이루어낸다고 할지라도 국민이 불안과 혼돈 속에서 떨게 된다면 문민정부를 향했던 사나운 민심은 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

예전 집집마다 춘첩에 ‘국태민안(國泰民安) 가급인족(家給人足)’을 적어 대문에 붙인 이유가 무엇이겠나. 국민은 위정자에게 다른 무엇보다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며 집집마다 넉넉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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