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대한민국은 위기상황…
정당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 앞세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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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민국은 위기상황…
정당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 앞세워야”
  • 나정영 국장
  • 승인 2009.03.19 1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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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연대 前 대표' 박명환 변호사 인터뷰

"존경까진 아니더라도 사랑받는 정치인 되고파"

[매일일보=나정영 국장] "주변의 선배(정치인)들을 보면 (임기 후) 뒷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고 한결같이 초라해 보이더라. 언행일치, 시종일관, 선공후사의 정치를 하면 존경까진 아니더라도 사랑받는 정치인이 되지 않겠는가? 정치인들이 이걸 알고는 있지만 깨닫지는 못하는 것 같다. 철학이 없는 정치인이 되고 싶지 않다."

지난 대선에서 'MB연대 전국대표(좌장격)'로 국민에게 더욱 친숙해진 박명환 변호사는 생각보다 '호되게' 현 정치권을 나무랐다. 상당수 정치전문가들이 또는 현직 정치인들이 간접화법을 통해 현 정치권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과 달리, 그는 '예비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직접화법을 통해 스스럼없이 문제점을 지적하고 방향타를 던졌다. 심지어 "국회의원이 매력적인 직업인지 의문이 든다" "국민에게 욕먹는 직업이 국회의원"이라며 현 정치권에 강한 쓴소리를 끊임없이 던지기도 했다.

대선을 전후로 박 변호사는 '법조인'이기 전에 'MB맨' 'MB연대 전국대표'로 더 유명세를 치렀다. 그 기세를 몰아 'MB연대' 출신 중 처음으로 지난해 4월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출사표를 던졌지만 당시 '거물급 정치인' 민주당 추미애 의원에 석패했다. 결과적으로 추미애 의원의 높은 인지도 벽을 넘지 못한 셈이다. 그럼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한나라당 부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한나라당 서울시당 광진을 당협위원장까지 역임하고 있다. 그는 도대체 왜 '법조인'과 '정치인'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24시간을 종횡무진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올해 마흔 한 살이다.

다음은 지난 18일 오후 4시 서울 서소문 알리안츠빌딩 11층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 법무법인 '비전'에서 매일일보 나정영 편집국장과 인터뷰 내용이다.

▲ 박 변호사는 "언행일치, 시종일관, 선공후사 정치를 하면 사랑받는 정치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이명박 대통령은 여전히 자신을 지지했던 'MB연대'에 대해서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더라. 대선 이후 'MB연대'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대선이 끝나자마자자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지금은 지난 대선 때 이명박 후보 유세 지원 활동에서 크게 기여한 MB연대산악회 회장 출신인 한덕문씨가 차기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저는 지금 명예대표로만 있을 뿐 실질적으로는 조직활동에 전혀 관여를 안하고 있다. 대선 전 대표가 되면서 회원들에게 '대선 종료 후 엠비연대를 해체하겠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개인적 생각이었다. 대선 후 조직회의를 통해 '봉사단체' 등 어떤 단체로 나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제 의견과 달리 다수 회원들 의견을 존중하기로 하고 조직을 해체하지 않았다. MB연대 회원들은 각자 생업을 하면서 중앙과 지역조직이 연계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 'MB연대' 대표로서 대통령 당선에 적잖은 공헌을 했는데, (각계각층으로부터) 여러 가지 제안은 없었나.

"이미 총선에 출마한 경험이 있고, 지구당 위원장을 비롯해 한나라당 당직자로서 역할을 맡는 등 여러 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 또 방송통신위원회 특별위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필요한 부분이 있어서 작은 역할을 하기 위해 만약 앞으로 기회가 온다면 스스로 생각을 해보겠다.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오바하는 건지 여러 가지 고민을 할 것이다."

- 총선 출마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한번 듣고 가자. 박 변호사는 지난 총선(서울 광진 을)에서 출사표를 던져 민주당 추미애 의원에 패하기도 했다. 출마 배경은 뭔가.

"원래 살던 곳은 올림픽공원 앞 잠실 쪽이었다. 그때 총선 출마를 갑자기 결심을 하게 됐는데 비례대표나 (고향인) 영남쪽 지역을 출마하게 된다면 그것은 당시 이명박 대통령 지지 모임을 이끌었던 대표로서 대통령께도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가 출마하게 될 경우 한나라당 텃밭이 아니었던 광진을에 출마를 결심했다. 광진을은 23년간 한번도 한나라당이 당선된 적이 없던 '자갈밭'이었다. 결국 그쪽에 출마해 우리 텃밭으로 다지고 온다면 현 정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출마했다."

- 당선될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나. 아니면 일종의 프로필 관리 차원이었나.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저는 정치 초년병으로서 조금 강한 지역에서 붙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필을 관리하기 위함은 정말 아니다. 당시 18대 총선에서 공천파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추미애 의원보다 가상대결에서 높게 나왔다. 당시 '역바람'이 한번 불어서 좋지 않은 상황까지 치달았다가 다시 한번 제 쪽으로 바람이 불면서 한참 추격했는데, 결국 떨어졌다. 제가 공천을 늦게 받은 점도 있지만, 마지막에 역부족으로 떨어진 것 같다. 그러나 광진을을 한나라당 지역구로 가져오겠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경력관리 차원에서 도전했다면 떨어지는 지역은 출마를 안했을 것이다."

- 성급한 질문이지만, 19대 때도 그렇다면 광진을에서 출마할 계획인가. 광진을은 전통적으로 호남 출신 유권자가 많아 전통적으로 민주당 텃밭 아닌가.

"지금은 (출마를) 생각을 갖고 있다. 현재 광진을 지역 당의 위원장을 맡고 있고, 그로 인해 지역민들을 만나고 있다. 이명박 정부도 더 좋은 모습으로 국민에게 다가갈 것이고…. 18대 총선에서 제가 출마할 때 저는 13%의 지지율이었고 추미애 의원은 무려 97%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달 여 선거활동을 하면서 추 의원과 지지율 격차를 9~10%까지 줄였다. 4년 후는 더욱 다른 모습일 것이다. 광진을에는 호남분이 많다. 저는 영남사람이지만 지역감정을 떠나서 제가 그 곳에 살고 있고, (후보시절) 지역주민들과 약속을 한 게 많다. 그래서 지금도 지역을 돌보면서 어떻게 하면 지역개발 등 지역발전을 위해 도움이 될까 신경을 쓰고 있다. 실제 지역행사를 통해 지역민들과 스킨십을 자주 한다. 요즘 지역주민들이 1년 전 선거 때보다 더욱 반긴다."

- 지난 총선에서 여의도 정치판을 바꿔보겠다며 또 구태정치를 타파하겠다며 무려 148명이나 되는 청년들(20대 16명 포함)이 출사표를 던진 바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부 정치인을 제외하곤 '여의도'에 '젊은 피' 수혈은 성공하지 못했다. 줄곧 "서민과 중산층이 웃을 수 있는 정치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강조해왔던 박 변호사는 요즘 시끄러운 여의도 정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최근 '젊은 피'에 가까운 한나라당 초선 의원들이나 중진 의원들을 만나서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각자 역량이 뛰어나고 다들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들 속에서 당이 전체적으로 움직이다 보니까 각자의 목소리가 경우에 따라서 다르게 나올 수도 있고 일관되지 않아서 미약하게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한나라당이 좀 더 힘있는 정당,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당의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간절하다."

- 법조인으로서의 삶도 궁금하다. 사법연수원 32기 수료 후 바로 법률사무소를 개업했고 '다수의 소비자 소송'으로 유명하다.

"소비자 시민의 모임에서 법률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소비자 소송 쪽 부분에 관심을 갖게 됐다. 총선 전에는 공익소송적 측면을 주로 다뤘는데 총선을 통해서 사무실을 떠나며 외유를 했기 때문에 지금은 단체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것은 없다(웃음).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인터넷 쇼핑몰 사기피해사건이다.(박 변호사는 2004년 인터넷 쇼핑몰 '하프플라자' 사기 사건으로 피해를 본 소비자 2600여명을 대리해 44억여원의 배상 판결을 이끌어냈다) 전국 피해자만 10만여 명이었고 피해액만 수백억원이었다. 당시 변호사 비용을 받지도 않고 제가 소비자 3천명 정도를 대리해 중앙지법에 소송했다. 그 사건은 지금도 주목받아 사법연수원 교제에도 실려있다. 분양과 관련된 사기사건도 많이 다뤘는데, 대부분 사회적 약자들이 피해를 본 사례가 많이 있어서 소송을 했고 공정거래위원회 약관 개정을 한 사례도 있다.

- 질문을 시장경제 쪽을 돌려보겠다. 박 변호사는 공정거래위원회 민간 전문위원이기도 하고, 경실련 시민권익센터 운영위원으로도 일을 했다. 외부에서 '한국 경제 상황이 외환위기 못지않게 위험하다'는 지적이 거세지고 있다. 때문에 '경제를 살리겠다'고 탄생한 이명박 정부도 곤혹을 치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을 옆에서 지켜봤던 사람으로서 현 경제상황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으며 나름대로의 해법을 제시한다면.

"제가 경제전문가는 아니니까 구체적인 말씀은 드리지 못하겠지만, 일단 어려운 세계 경제 속에서 미국과 중국,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우리나라가 큰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런 한국의 상황 속에서 현 정부가 추진하려고 하는 여러 가지 경제개혁, 경제정상화 전략과 전술 등 이런 부분들이 국회에서 나름대로 개혁 입법을 통해 추진될 부분도 있는데 이런 게 늦춰줘서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을 한다. 이 대통령은 제가 볼 때 누구보다도 자신을 지도자로 만든 국민의 요구를 정확히 알고 있다. '왜 나를 찍었나? 경제를 살려라'고 찍은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안타까운 점은 미국과 같은 외국의 사례를 보면 정치권이 단합을 잘하는데 우리 세태를 보면 발목을 잡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우리도 부족한 게 많지만 국민의 단합에 대국민적 생각을 가지고 정치를 하는 자세가 좀 더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을 하고 있다."

- 중견로펌의 대표 변호사로서, 미래의 정치인으로서 24시간이 부족할 것 같은데, 향후 계획과 포부가 있다면.

"개인적 생각이지만 물이 흘러가듯 가겠다. 개인적으로 여의도 직행은 큰 욕심이 없다. 변호사 박명환으로서 소비자 운동을 통해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을 것 같다. 변호사업을 하면서 느끼는 게 입법부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 법안을 정비하고 또 새롭고 필요한 분을 만드는 것이 더 의미있는 일이 아닌가, 부끄럽지만 그런 생각을 한다. 국회의원이 왜 매력적인 직업인지 의문이 든다. 요즘 국회의원이 됐다고 해서 부와 명예를 누리는 것도 아니다. 요즘보면 돈을 더 쓰더라. 국회의원 권력도 국정감사 때나 공무원 앞에만 있을 뿐, 일반 서민들에게 권력을 행사할 일이 결코 없다. 국민에게 욕먹는 직업이 국회의원이다. 의원이 되면 집안의 명예일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명예로움을 보고 의원이 되야 하는지 의문이다. 앞으론 의원이라는 '공직자'로서 사명감을 갖고 일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이 계속) 실망할 것 같다. 주변 선배들의 뒷모습을 보면 초라해보이더라. 우리나라엔 존경받고 사랑받는 정치인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은 없다. 우리나라 정치인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고, 처음과 끝이 다르며, 공보다는 사를 앞세운 정치를 한다. 역으로 이야기 하면 언행일치, 시종일관, 선공후사 정치를 하면 존경까진 아니더라도 사랑받는 정치인이 되지 않겠는가. 정치인들은 이걸 알고 있지만,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철학없는 정치인이 되고 싶지 않다."

- 마지막으로 정치권을 향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다면.

"추상적 이야기지만 조금 더 잘해주길 바란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위기상황이다. 정당의 이익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앞세우고 개개인의 이익보다는 공익을 앞세우는 그런 큰 모습에서의 그림을 그려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담=나정영 편집국장 / 글=최봉석 기자

박명환 변호사가 털어놓은 'MB연대' 탄생 뒷 이야기

박 변호사는 변호사 시절 '정치권에 입문한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다고 했다. 어렸을 적부터 가정환경이 무척 좋지 않았고 사법고시마저 계속 떨어져 어머니 고생을 많이 시켰다고 했다.

그래서 변호사로 일찍 개업해 나왔다. 이후 변호사로서 전문화를 이룸과 동시에 큰 로펌을 만들고자하는 꿈을 키우기 위해 주력해왔다.

그런 꿈이 무르익어가던 지난 2005년 어느 날. 그는 젊은 변호사들과 소주를 마시면서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지"에 대해 고민을 하고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당시 변호사들은 "좌우 이데올로기를 떠나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자는데 견해를 같이 했고, 당시 그 점을 표방했던 이명박 서울시장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박 변호사는 그래서 일을 저질렀다. 곧바로 송법회를 만든 것.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의 호가 '일송'이었기 때문에, '송'자를 가져왔고 '법조인'의 '법'을 따서 만들었다. 그렇다고 '송법회'가 대단한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술을 마시는 모임 정도였고 출발도 5명에 불과했다.

이후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전국적으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모임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온.오프라인을 중심으로 "모임을 통합하자"는 움직임이 감지됐다.

결국 대표들이 한 자리에서 모였다. 박 변호사는 '송법회'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모임명을 'MB연대'로 했고 박 변호사는 운좋게도 초대 대표로 추대됐다.

박 변호사는 "초대 대표를 맡게 되면서, 이것을 단순한 모임의 연대체로 끝내는 게 아니라 개인이 합류하는 전국조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당시 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2006년부터 전국을 뛰어다녔고 제주도부터 시작해 LA, 워싱턴, 중국까지 지부를 뒀다"면서 "30만 명까지 조직원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고 당시를 전했다.

최봉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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