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 ‘청정의 삶’ 마감한 鐵人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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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 ‘청정의 삶’ 마감한 鐵人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 신재호 기자
  • 승인 2011.12.16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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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인생을 영원한 조국에”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공식 영정
[매일일보=신재호·김민지 기자] 철강불모지였던 대한민국에 사상 첫 일관제철소를 건설해 중화학공업 입국의 기틀을 다진 세계적인 철강왕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전 국무총리)이 13일 8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은 박태준 명예회장이 13일 오후 5시20분 급성 폐손상으로 별세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박 명예회장은 이 병원에서 10년 전 수술했던 흉막섬유종 휴유증으로 흉막 전폐절제술을 받고 입원 치료 중이었다.

앞서 지난 11월9일 호흡곤란으로 ‘흉막-전폐절제술’을 받기 위해 입원해 이틀 후인 11일 한쪽 폐 전체를 들어내는 수술을 받은 박 명예회장은 상태가 호전돼는 듯했지만 지난 5일 왼쪽 폐에도 급성 폐 손상이 생겨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1960년대 철강불모의 이 땅에 최초의 일관제철소를 성공적으로 건설하고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철강사로 성장시킨 한국 철강산업의 큰 별로 꼽히는 인물인 동시에 사후에 재산 한 푼도 남기지 않는 청빈한 삶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선조의 핏값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하는 일관제철소
성공 못할 경우 부지에서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몸 던지자”

철강왕의 유언은…“포스코가 국가산업 동력으로 성장한 것에
대단히 만족해…더 크게 성장해 세계 최강 포스코가 되어달라”

‘철강왕’이라 칭송받는 미국의 카네기는 당대 35년 동안 연산 조강 1000만t을 이루었지만, 박태준은 당대 25년(1968~1992년) 안에 연산 조강 2100만t을 달성했다. 기술력과 자본력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카네기보다 짧은 기간에 그 2배가 넘는 규모로 회사를 키워낸 것이다.

생전에 제철소를 두 곳이나 세운 인물은 박 명예회장이 세계에서 유일하다. 현재 포스코는 연산 3700만t 규모의 조강생산을 기록하는 세계 4위권의 철강사로 성장했고, 최근 철강경기 하락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철강사를 제치고 시가총액과 신용등급에서 모두 수위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다”

포스코가 현재와 같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60~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가 큰 역할을 했으나 박태준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헌신적인 리더십이 보태지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로 평가받고 있다.

1978년 중국의 최고 실력자 등소평이 일본의 기미츠제철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했다가 이나야마 요시히로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느냐”는 대답을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27년 동래군 장안면에서 태어난 박태준 명예회장은 일본에서 성장해 1945년 와세다 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해방으로 학업을 중단한 후 귀국해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6기로 졸업했다. 이때 교수로 재직 중이던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인연을 쌓았다.

1963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후 경제인으로 변신, 1964년 대한중석 사장에 임명되어 1년 만에 대한중석을 흑자기업으로 바꾼 박태준의 경영능력을 높게 평가한 박정희 대통령은 그에게 종합제철소 건설 특명을 내린다.

이때부터 박 명예회장은 제철소 건설과정에서 고비고비마다 벌어진 난관을 특유의 결단력과 열정으로 극복하면서 세계가 부러워하는 철강신화를 일궈낸다. 제철소 건설과정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박태준 명예회장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준다.

1967년 어렵사리 일관제철소 건설 지원을 위해 조직된 국제차관단이 IBRD의 부정적인 전망으로 와해되자 일본의 유력인사들을 일일이 설득해 대일청구권자금을 전용하도록 해 피지 못할 수도 있었던 일관제철소 건설의 꿈을 꽃피게 했다.

▲ 1970년 포항제철소 기공에 관한 브리핑을 받고 내려오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맨 앞)과 박태준 회장(둘째 줄 가운데 점퍼)
‘제철보국’과 ‘우향우 정신’

포스코의 DNA와도 같은 ‘제철보국’과 ‘우향우 정신’은 박 명예회장이 건설초기 철강역군들을 하나로 만드는 공동의 좌우명이 됐다.

이 땅에 일관제철소를 건설해 경쟁력 있는 산업의 쌀을 안정적으로 공급, 조국의 은혜에 보답하자는 ‘제철보국’은 포스코의 설립 근거다.

또한 ‘우향우정신’은 선조의 핏값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하는 일관제철소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각오를 담고 있다. 성공하지 못할 경우 제철소 건설부지에서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몸을 던지자는 단호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박 명예회장은 공기업 체제에 따르는 비효율과 부실의 여지를 막기 위해 조직의 자율과 책임문화 정립에 특히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책임의식은 자연스럽게 완벽주의로 연결됐다.

1977년 3기 설비가 공기지연으로 고전하고 있을 때도 발전 송풍 설비 구조물 공사에서 부실이 발견되자 80% 정도 진행된 상태였지만 부실공사를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며 모두 폭파한 일은 완벽주의의 의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이다.

‘목욕론’도 박태준 명예회장의 일면을 이해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다. 박 명예회장은 “깨끗한 몸을 유지하는 사람은 정리, 정돈, 청소의 습성이 생겨서 안전·예방의식이 높아지고 최고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며 청결한 주변관리를 주문했다. 이 때문에 제철소 건설초기부터 현장에 샤워시설을 완비했다.

또한 1983년 광양제철소 호안공사 시공 때에는 감사팀 직원들에게 스쿠버 장비를 갖추게 하고 전문가 도움을 받아 바다 속에서 13.6㎞ 호안의 돌을 일일이 확인해 불량시공을 점검하기도 했다.

▲ 1973년 포항제철(현 포스코) 임직원들이 첫 고로 가동 성공에 기뻐하며 만세를 외치고 있다. 가운데 무표정하게 만세를 외치는 사람이 박태준 명예회장이다.
철저한 비리근절도 박 명예회장이 한결 같이 지향했던 경영철학이다. 1970년대는 설비공급사나 정치권에서 각종 납품 비리나 청탁 압력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당시 박태준 사장은 정치권의 압력 배제와 함께 설비 공급업자 선정의 재량권 인수 등을 골자로 하는 내용을 메모에 적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소위 ‘종이마패’로 불린 이 메모는 외부압력을 차단하고 비리를 근절하는 상징처럼 전해져 온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일찍부터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해 1986년 포항공대(포스텍)를, 이듬해에는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을 설립해 포스코-포항공대-포항산업과학연구원 등 3개 축으로 하는 산학연 연구개발 체제를 구축했다.

이는 국내 최초의 산학연 연구개발 체제로, 산업계 전반에 걸쳐 새로운 기술개발 모델을 제시했다. 포항공대는 박태준 설립이사장과 포스코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1986년 12월 국내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을 표방하며 설립됐다.

학사운영정책, 신입생 선발 등에서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획기적인 정책들을 과감하게 추진해 국내 정상의 대학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대학으로 성장했다.

‘끊임없는 지상명령의 삶’

1990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은 “한국이 군대를 필요로 했을 때 장교로 투신하고, 한국이 현대경제를 위해 기업인을 찾았을 때 기업인이 되고, 한국이 미래의 비전을 필요로 할 때 정치인이 되어, 한국에 봉사하고 봉사하는 삶이 끊임없는 지상명령이었다”고 박태준 명예회장을 평가했다.

미테랑 대통령의 헌사럼 평생을 한결같이 조국 발전에 헌신했던 박태준 회장은 53세인 80년, 정치에 입문해 민정당 비례대표(81년)와 자민련 포항 지역구(97년) 등 2차례 국회의원을 지냈고, 32대 국무총리를 맡기도 했다.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은 고난과 역경의 시기였다. 특히 동갑내기인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모진 악연은 여전히 세간에 회자된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한솥밥을 먹게 된 두 사람은 92년 민자당 대선 경선 과정에 관계가 틀어졌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 후에는 그에 대한 보복성 새무조사로 외국을 떠돌게 되었던 박태준 명예회장은 1997년 대선에서 DJP연합의 한 축으로 참여해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에 기여한다.

김대중정부에서 국무총리(2000년)를 역임한 그는 국무총리에서 물러나면서 40년간 거주하던 아현동 소재 주택을 처분해 사회에 환원했다. 1961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 당시 의장이었던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특별 하사금’를 받아 매입한 집이었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라는 좌우명을 일평생 지켜온 박태준 명예회장은 1960년대 제철소 건설초기부터 최근 명예회장으로 재직할 때도 단 한 주의 주식도 보유하지 않고 청정한 삶을 보여줬다.

▲ 포항제철 창업시절의 박태준 회장.
빈 손으로 떠난 마지막 길…

한편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남겨둔 재산이 한 푼도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유족 측 대변인인 김명전 삼정 KPMG 부회장은 13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빈소 앞에서 “박태준 명예회장의 개인 명의로 된 재산은 한 푼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김명전 부회장은 “병원비도 해결하지 못해 자녀들이 대신 지불하고 있었다”며, “현재 박 명예회장의 자택은 큰 딸의 소유로 되어 있으며 생활비도 자식들의 도움으로 해결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김 부회장에 따르면 박태준 명예회장은 유언으로 “포스코가 국가산업의 동력으로 성장한 것에 대해 대단히 만족한다”며 “더 크게 성장해 세계 최강의 포스코가 되어달라”고 말했다.

또 박 명예회장은 “포스코 창업 1세대 중 어려운 이가 많아 안타깝다”며 맨땅에서 포스코를 일군 창업동지들에 대한 애뜻함도 나타냈다고 한다.

가족들에게는 부인인 장옥자 여사에게 “고생시켜 미안하다”며 “화목하게 잘 살도록 해라”는 말을 남겼다. 유족으로는 부인 장옥자 여사와 1남4녀가 있다.  


조정래 “독립운동가의 반열…다른 재벌과 달라”

▲ 조정래 작가
“박태준 명예회장을 독립운동가의 반열에 올린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박 회장은 우리 경제를 살리는데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공을 세운 분이십니다.”

세기의 베스트셀러 『태백산맥』과 『한강』의 작가인 조정래씨는 2007년 11월 박태준 명예회장의 팔순과 위인전 출판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정래 작가는 같은 해 10월, 박태준 명예회장을 신채호, 안중근, 한용운, 김구 등 4인의 독립운동가와 묶어서 펴낸 『큰 작가 조정래의 인물 이야기』(문학동네어린이 펴냄)라는 위인전기집을 펴낸 바 있다.

조 작가가 생존인물로는 유일하게 박태준 명예회장을 포함시킨 이유는 『한강』 집필 과정에 포항제철 관련내용을 쓰면서 박 명예회장에 대해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 작가는 박 명예회장에 대해 “권력욕만 추구하는 다른 재벌들과 다른 순수한 기업인”이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박 회장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위인전을 쓴 이유를 밝혔다.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부도덕한 한국 재벌들에 대해 강도 높은 비난을 쏟아낸 바 있는 조정래 작가는 13일 박 명예회장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가 유족들과 함께 임종을 지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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