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 한나라 선거전략 브레인 정두언 여의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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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 한나라 선거전략 브레인 정두언 여의도연구소장
  • 김경탁 기자
  • 승인 2011.07.26 1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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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복심’에서 ‘脫친이계’ 선언까지 파란만장했던 그의 정치역정

[매일일보= 김경탁․변주리 기자] 4·27 재보선 이후 급부상한 신주류 소장파의 좌장격인 정두언 의원이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이하 여연) 소장에 선임됐다. 1995년 한국 최초의 정당연구소로 설립된 여연은 원래 ‘정책’을 만드는 조직이지만 실제로는 한나라당의 ‘선거 전략’을 짜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역대 소장직은 ‘정치감각이 좋다’는 대내외적 평판을 얻은 전현직 국회의원들이 주로 맡아왔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사람이 ‘꾀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다.

윤여준 전 장관 외에 역대 소장으로 눈에 띄는 인물로는 유승민 최고위원, 박세일 전 정책위 의장,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 임태희 대통령실장,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있고, 정두언 신임 소장의 전임자는 주호영 전 초대 특임장관이었다.

한때 “모든 것은 정두언으로 통한다”던 이명박 대통령 최측근에서

‘만사정통’ vs. ‘만사형통’ 맞대결 한 방에 비주류만도 못한 처지 전락

여연 소장 선임 통해 ‘자신감’ 회복, 거침없는 발언으로 정치 중심 복귀

李 대통령, 홍준표 대표, 박근혜 전 대표 등 상대 안 가리는 비판도 화제

기나긴 ‘왕따’

이명박 정권의 대표적 창업공신이었던 정두언 의원은 정부 출범과 동시에 권력의 주류에서 밀려났다. 정권 초기부터 이명박 대통령의 형님(이상득 의원)에 대한 ‘55인 공천 항명’과 ‘권력 사유화’를 정면 거론하다 당내 주류(친이계)로부터 미운털이 박혔기 때문이다.

정 의원은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수도권 공천자 20여명과 함께 이상득 당시 국회부의장에 대해 ‘형님 공천’, ‘형님 인사’ 등으로 인해 한나라당에 민심이 악화됐다며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8대 총선에 불출마할 것을 요구했지만 뜻을 이루는데 실패했다.

이어 같은 해 6월에는 사실상 이상득 의원(18대 총선 당선)을 겨냥한 ‘권력 사유화’ 발언을 통해 승부수를 띄웠지만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기반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정 의원은 당시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상득 의원과 그와 가까운 류우익 청와대 비서실장과 박영준 기획조정비서관, 장 다사로 정무1비서관 등을 국정 혼란의 진원지인 '4인방'으로 지목, “권력을 사유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계기로 일어난 ‘반(反) 이상득 바람’은 다수의 이재오계 의원과 소장파 의원들에게까지 확산돼 거세질 듯 했지만 불씨는 금세 수그러들고 말았고, 이후 이상득 의원은 당을 혼자 장악하다시피 하면서 국정 운영 전반을 주도하게 됐다.

이 일로 정 의원은 당 안팎의 공격을 받으면서 향후 정치 행보에 부담을 안게 됐다. 자신의 폭로가 국민들에게 여권의 권력 암투로 비쳐지면서 총체적 난국에 처한 이명박 정부에게 악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책임을 면치 못하게 된 것이다.

특히 당시 쇠고기 정국으로 위기에 처한 이명박 정부를 궁지로 몰아넣은 꼴로 비화되자 정 의원은 사의를 표명하고 일체 정치 전면에 나서는 일 없이 주로 대학원과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거나 지역구 행사에 참석하며 약 7개월 동안 긴 암중모색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비박, 소장파…“난 친이 아니다”

2009년 말 당내 국민소통위원장직을 맡으면서 조금씩 정치적 보폭을 넓히기 시작하기는 했지만, 한때 “모든 것은 정두언으로 통한다”라는 뜻의 ‘만사정통’으로 통하던 그가 권력의 주류에서 완전히 밀려났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특히 2010년 9월 초 불거진 총리실 산하 공직자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 피해자에 정두언 의원을 비롯한 남경필, 정태근 의원 등 이상득 의원에게 저항을 했던 정치인들까지 포함됐던 사실이 밝혀진 것은 정 의원이 처한 상황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였다.

지난 5월 초 한 언론사 인터뷰에서 “비박(非朴)이라는 공통점 외에 ‘친이’는 원래부터 없고, 저는 분명히 ‘친이’가 아니”라며, “이제 내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한 그는 4·27 재보선 이후 출범한 소장파 모임 ‘새로운 한나라’의 좌장격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소장파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그가 ‘탈친이’를 공개선언하고 ‘비박, 소장파’로 분류된 것은 한나라당이 18일 여의도연구소장에 내정되는 데 주요배경으로 작용했다.

당초 한나라당 최고위는 사무총장에 홍준표 대표의 측근인 김정권 의원을 임명하는 대신, 여연 소장과 제1사무부총장은 친박계 인사를 임명한다는 암묵적 공감대를 이뤘지만, “친박계가 당직을 독점한다”는 여론을 피하기 위해 ‘한때 친이’였던 정 의원이 낙점된 것이다.

되찾은 자신감

이번 여연 소장 인선에 따라 정치인으로서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 정두언 의원은 과거와 같은 ‘자신감’을 회복한 듯 거침없는 발언과 행보로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다시 섰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과,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 그리고 박근혜 전 대표까지 상대를 가리지 않고 비판의 수위와 빈도를 높여가고 있다.

정두언 의원은 지난 18일 <월간조선>에 기고한 ‘7·4 전당대회를 마치고’라는 글을 통해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이 지금 같아서는 재집권이 어렵다”며 “이명박 정부에 대한 최근의 민심은 노무현 정부 말기와 거의 같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이후 모든 게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며, “이는 한마디로 정치의 기본을 지키지 않아서 생긴 일로, 청와대가 아직도 측근인사, 회전문 인사로 당을 어렵게 만드는 것으로 보아 재집권보다 레임덕 방지에 치중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꼬집었다.

정 의원은 또 홍준표 신임 대표에 대해서도 “할 말을 하겠다던 홍준표 대표는 청와대의 무리한 인사에 손을 들어주는 등 당초 기대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며 “홍준표 호의 불길한 앞날이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새 지도부의 당 운영을 우려했다.

정 의원의 파격적인 발언은 다음 날에도 계속 이어졌다. 한상대 검찰총장 후보자가 디스크로 병역면제를 받아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정두언 의원은 19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부잣집 아들들은 대부분 디스크를 앓고 있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는 “대학시절 군대문제로 고민하다가 깨달았다. 그 당시 우리나란 대체로 군대가는 계급과 안 가는 계급으로 나뉘어 있었다”며 “그런데 더 의아스러웠던 건 부잣집 아들들은 대부분 디스크를 앓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부잣집 아들과 디스크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라고 뼈 있는 발언을 던져 화제를 낳았다.

이와 관련 20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나와서는 한상대 검찰청장 후보자의 병역 문제를 지적한 것이 아니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이왕이면 군대 갔다 온 사람 중에서 선택을 해줬으면 하는 개인적인 소망이 있다”며 “가급적이면 민심에 맞게 인사를 제발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청와대를 재차 겨냥했다.

정 의원은 박근혜 전 대표가 총선에서 지역구(대구 달성군)에 출마하겠다고 밝힌 것과 관련해서도 “박 대표 같은 분이 불출마를 한다든가 아니면 비례대표 끝자리를 나온다든가 수도권 출마한다든가 하는 것이 당에 아주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왜 그렇게 결정하셨을까 개인적으로 실망스럽고 아쉬움이 크다. 지도자로선 과감하게 리스크테이킹(위험 감수)을 해야한다”고 비판했다.

이 발언은 친박계의 주류로 떠오른 반발을 일으켰다. 친박 정당인 이규택 미래연합 대표는 22일 PBC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이상도입니다>에서 “정 의원이 서울을 떠나 고향인 호남으로 가는 것이 더 신선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규택 대표는 “총선이 아직 10개월 남았는데 지역구 옮기는 것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한가스러운 일”이라며 “시기도 적절치 않고 (당 여의도연구소장이라는) 책임을 맡은 사람이 내부의 유력 후보자 한 명을 계속 공격하는 것 역시 적절치 않다”고 비판했다.  


 

‘만능 엔터테이너’ 정두언은 누구?

현역 가수, 전직 탤런트 지망생…노래하고 연기하는 정치인

▲ 2008년 10월 뮤지컬 배우로 데뷔한 정두언 소장. 그는 2004년 한나라당이 자체제작한 풍자연극 ‘환생경제’와 ‘별주부전’을 통해 연극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정두언 여연 소장은 24회 행정고시 출신으로 1981년부터 당시 정권의 2인자였던 노태우 정무장관실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해 1985년부터 2000년 2월 신한국당 서대문을 공천을 받기 직전까지 국무총리실에서 공무원으로 승승장구해왔다.

이회창 당시 신한국당 총재의 권유로 정치권에 발을 디딘 정 소장은 2000년 4월 16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이명박 대통령과의 만남을 계기로 정치인 정두언의 삶에는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 소장이 이명박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공무원을 그만두고 선거에서도 떨어진 2000년이었다.

1996년 총선 과정에서 발생한 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유죄가 확정되기 전에 국회의원직을 자진사퇴한 후 1999년부터 2000년까지 미국 유학을 갔던 이 대통령이 귀국한 후 서울시장 도전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당시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해 있던 정두언을 문병차 찾아간 이 대통령은 한나라당 서대문을지구당위원장을 맡고 있던 그에게 “같이 일 좀 하자”고 도움을 청했고, 이 대통령 자서전 『신화는 없다』를 통해 호감을 갖고 있던 정두언은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2002년 이 대통령의 서울시장 선거 캠프에 합류한 정두언은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에 당선된 후 서울시 정무부시장에 임명됐고, 이때부터 정두언은 이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이후 2007년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전략기획총괄팀장을 맡은 정두언은 사실상 ‘종합상황실장’으로서 전략기획을 비롯해 홍보, 네거티브 대응 등 거의 모든 실무를 지휘해, 자타가 공인하는 이 후보의 ‘복심(腹心)’으로 공인받았다.

이명박 후보의 ‘핵심 6인방’중 한 사람으로 불렸던 정두언 의원은 이명박 당시 후보가 치열한 경선과 BBK 사건 등 각종 검증 공세를 뚫고 대선에서 승리하기까지 그림자처럼 그를 보좌해 이 후보를 ‘서울시장’에서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정두언 소장은 2005년 데뷔해 2009년 4집 앨범을 낸 ‘현역 가수’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1987년에는 한국방송(KBS) 탤런트 공개모집에 응모해 최종 단계까지 올라가기도 했던 만능 엔터테이너이다.

그는 최근 여러 인터뷰에서 당시 탤런트 도전에 대해 “4·13 호헌조치(대통령 직선제 거부)가 내려지자 공직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1987년 KBS 신인탤런트 12기 공채시험의 최종 합격자 발표가 4월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4·13호헌조치’와 공직 포기 결심을 곧바로 연결하는 것은 조금 의심스러운 측면이 있다.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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