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서거] 산업화 주역...쿠데타와 지역주의 오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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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서거] 산업화 주역...쿠데타와 지역주의 오명도
  • 박규리 기자
  • 승인 2018.06.24 15: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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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쿠데타·한일협정·지역주의 주도에 비판 목소리 / 3김정치 민주화 구현·급속한 산업화는 공으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92세. 이로써 김대중·김영삼·김종필 트로이카가 이끌어왔던 '3김(金)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 국회에서 열린 야권 3당총재 회담. 왼쪽부터 민주당 김영삼, 평민당 김대중, 공화당 김종필 총재. 사진=연합뉴스

[매일일보 박규리 기자] 고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30대에 육사 8기들과 군사쿠데타를 성공시켜 한국 현대사의 물길을 바꾼 장본인이다. 이후 40년에 걸쳐 그는 '현대사의 메이커'로서 활약했다. 굵직굵직한 사건에는 그의 모습이 등장했다. 하지만 역사의 무대에서 그는 주연의 자리를 번번이 놓치며 '2인자'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만큼 부침이 심했던 그의 인생 역정은 '풍운아'라는 말이 어울리는 삶이었다.

▮쿠데타로 2인자...한일협상 주도

박정희 당시 장군의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2인자로 자리매김한 김 전 총리는 쿠데다 직후 들어선 박정희 정부의 경제부흥을 전면에서 진두지휘했다. 그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밑그림을 그렸고 경부고속도로 개통도 주도했다.

그러나 김 전 총리는 5.16 쿠데타에 가담했다는 점에서 경제발전의 공보다는 박정희 정권의 군부독재를 상징하는 인물로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반면 3김시대를 함께 한 김영삼(YS)과 김대중(DJ)은 군부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야당 정치인으로 긍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는 또 경제성장이란 국가적 목표를 위해선 인권을 포함한 민주주의를 유보할 수 있다는 핵심 이념인 '박정희주의'를 앞장서서 실천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기초로 1964년 체결된 한일협정이다. 

당시 '특명전권대사' 직함으로 활동하며 한일협정 체결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김 전 총리의 발언은 국민으로 하여금 분노를 불러일으킸다. 전국 각지에서 한일협정 체결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은 서울로 모여 대규모 시위를 진행했는데 그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1964년 6월 3일의 시위, 이른바 6.3항쟁이다.

그러나 김 전 총리는 당시 자신을 향한 '굴욕외교' 비판에도 "한일협정에 장애가 된다면 차라리 독도를 폭파해버릴까"라고 했고, 1962.10 일본 이케다 수상과의 회담에선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한일 국교를 정상화시키겠다"고 말하는 등 협정 체결에 의지를 꺾지 않았다. 해당 조약과 관련해 긍정적 평가를 내놓는 일각에서는 당시 협정으로 '한일관계 정상화' 및 '한국 기간산업 육성'에 큰 역할을 발휘했다고 평가한다.

반면 한일협정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측면에서는 '한국과 일본 사이 일제강점기에 대한 모든 것을 없었던 것'으로 하는 한일기본조약 때문에 일본측의 명확한 사과를 받아내지 못했고 배상금 액수도 "헐값"이라며 주장하고 있다.

▮3김시대 민주화 이후 정치 쥐락펴락

이른바 '3김 정치'가 정치사 전면에 등장한 건 87년 대선으로 5공 신군부인 노태우 정권이 탄생했을 때다. 당시 국민적인 열망에도 불구하고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던 YS-DJ는 이듬해 JP까지 포함해 총선에서 저다마 야당을 이끌며 여소야대 구도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여야 견제정치의 시작이었다. 이후 세 사람은 대선을 향한 경쟁과 대립 속에서도 결국에는 타협의 정치를 하는, 극단적인 대립으로 가지 않고 결국에는 국가 이익에는 협조하는 정당정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 예로 1990년도 1월달에는 JP를 주도로 3당 합당을 통해 그 당시 보수 대연합의 하나의 단초를 마련했다. 또 92년 대선에서 JP는 YS가 손을 잡아 김영삼 정부라는 보수정권을 탄생시키는 산파역할을 했다.

이후 97년 대선에선 JP가 DJ와 내각제 개헌 약속을 통해 DJP 연합을 만들어 김대중 정부와 김종필 총리 시대로 압축되는 진보정치의 시대를 열었다. 정당 역사에서 협치정신을 구현해 정권을 창출해 내는 시기였다. 그러나 DJ가 내각제 개헌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DJP와의 공조도 깨지는 아픔도 맞이한다.

그러나 이들 3김정치를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세 번의 정권을 거치는 동안 이들이 각각 영남과 호남, 충청권 등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지역 패권주의'와 당내 '보스 중심의 계파 정치' 폐단을 남겼다고 주장한다.

반면 87년부터 90년대 말로 축약되는 3김시대에는 우리나라의 산업화와 급속히 진행되어 국민소득이 2500달러에서 1만2000달러로 급속이 올라갔으며, 또 여소야대를 통한 견제 정치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민주화의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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