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우리는 어떤 왕을 원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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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우리는 어떤 왕을 원하나
  • 송병형 기자
  • 승인 2018.03.26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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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형 정경부장

국가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면 나무만이 아니라 숲까지 보아야 한다. 숲을 보려면 반드시 역사를 돌아봐야 한다. 제왕적 대통령제 개헌안 논란도 예외는 아니다.

제왕적 대통령제 이야기는 근대 시민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한 뒤 건국과 함께 대통령제를 채택했을 때 영국인들은 ‘영국왕을 거부한 반란자들이 자신들의 왕을 새로 뽑았다’고 비아냥댔다. 왕권 승계라는 정통성이 결여된 흉내 내기 ‘선출왕’이라는 비꼼이었다.

외견상 그런 평가가 나올 만했다. 미국의 대통령은 의회의 간섭에서 벗어나 행정권을 장악했다. 왕이 놓지 않으려던 행정권을 기어코 의회로 가져온 영국 시민들의 눈에는 역사적 퇴보였다. 미국 상원의 모습도 영국 상원처럼 구시대적 잔재를 살려둔 듯했다. 대통령의 러닝메이트이자 대통령 유고시 자리를 넘겨받을 부통령은 상원의장 자리를 보장받았다. 마치 귀족이 장악한 영국 상원의 모습과 같았다.

그러나 영국 시민들의 비아냥에도 미국 대통령제는 잘 굴러갔다. 애초 미국 대통령제는 연방제의 산물이었다. 각 주들은 연방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길 원했다. 영국의회처럼 다수당이 입법과 행정을 좌지우지하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하원의 역할을 최소화했고, 상원의 견제에 더해 대통령의 견제까지 얹었다. 그 결과물이 입법과 행정이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동시에 양당제로 정치세력 간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대통령제였다. 심지어 건국세력들은 연방정부를 미국의 중심지 뉴욕에서 밀어내 버지니아 주와 메릴랜드 주 경계를 따라 흐르는 포토맥강변으로 옮기기도 했다.

미국 대통령제의 성공은 왕을 자신들의 손으로 단두대에 올린 프랑스인들을 유혹했다. 로베스 피에르의 공포정치, 사회주의체제를 연상시키는 제1공화국, 나폴레옹의 제1제정, 왕정복고, 7월혁명으로 탄생한 입헌군주제를 거친 뒤 1848년 프랑스인들은 2월혁명으로 드디어 대통령을 자신들의 손으로 뽑았다. 제2공화국 프랑스 선출왕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첫 선출왕이 된 나폴레옹의 조카는 시민들의 염원을 저버리고 제2제정을 열어버렸다.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하며 제2제정이 막을 내린 뒤 프랑스인들은 의회가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했다. 제3공화국의 탄생이었다. 이는 2차대전 이후 제4공화국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프랑스의 선출왕은 다당제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정치세력 간 타협으로 선출된 총리에게 휘둘렸고, 제대로 자리를 지키는 이가 드물었다. 프랑스 선출왕의 고달픔은 드골이 제5공화국을 열고서야 끝이 났다. 5공화국의 선출왕들은 의회가 선출한 총리를 휘하에 거느리고 ‘진짜왕’처럼 군림했다. 사실상 동시에 치르는 총선과 대통령 선거는 다수당의 대통령에게 총리를 휘어잡을 수 있는 권력을 줬다.

한국은 프랑스 5공화국의 선출왕을 능가하는 제왕적 대통령들을 봐왔다. 이제 우리가 선택하려는 선출왕은 어떤 왕인가. 총리를 거느리는 프랑스의 선출왕인가. 아니면 견제와 균형에 충실한 미국의 선출왕인가. 그도 아니면 총리 자체를 정치적 총알받이로 여기는 한국 고유의 선출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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