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근 “국민의 명령, 그것을 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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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근 “국민의 명령, 그것을 알리고 싶다”
  • 송병승 기자
  • 승인 2011.01.28 15: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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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 참여정부 5년, 산에만 다닌 그가 다시 거리로 나선 까닭

[매일일보=송병승 기자] 1953년생. 환갑을 몇 년 남겨놓지 않은 나이. 동료 배우들이나 감독들은 어느덧 사회적 위치를 가졌고 동년배의 남성들은 가장의 무게를 조금씩 벗어던지고 휴식기로 들어갈 무렵, 배우 문성근은 자신의 생각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다시 ‘거리’로 돌아 왔다.

야권연대의 시험무대였던 지난해 6·2 지방선거가 끝난 직후부터 구상을 시작해 실제 행동에 나선지 어느덧 80여일째. 문성근은 ‘백만 송이 국민의 명령’ 이라는 이름 아래 비가 오는 날에는 비를 맞고, 한겨울 찬바람이 불면 찬바람과 맞서며 전국의 시민들에게 ‘야권 통합’을 소리치고 있다.

‘되면 좋지만 그게 설마 되겠느냐’는 민주진보진영 내부의 압도적 회의론과 대다수 언론의 절대적 외면에도 불구하고 문성근이 80여일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끌어모아 불붙인 ‘들불’의 숫자가 어느덧 6만6천명을 넘었다는 소식이다.
 
재야의 대부 늦봄 문익환 목사의 아들,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한 시대 최고의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했던 방송인, 현실참여형 문화예술인 그리고 친노좌빨 연예인. 이 모두가 배우 문성근을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여기에 ‘100만 민란군의 수장’이라는 호칭을 더한 요즘. 문성근 그가 알고 싶어졌다.

문익환의 아들, 노무현의 남자, 그리고 100만 민란의 수장
“결선 없는 선거법이 문제야? 그럼 예선 치르자” 역발상

직접 제안하고 혈혈단신으로 시작해 전국으로 번진 ‘들불’
칼바람 맞고 다닌지 80여일만에 벌써 6만6천여 회원 모집

다른 연극인들에 비해 직업배우로서 문성근의 시작은 매우 늦은 편이었다. 서른 두 살. 대학에서 연극반 활동을 하긴 했지만 연기자로는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는 졸업 후 취업을 택했다.

대기업 건설회사에서 보낸 8년 동안의 회사생활 동안 자신이 거대한 기계의 작은 부속품으로서 마모되어 간다고 느낀 문성근은 조직체의 일원이 아닌,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 과감히 직장을 그만두고 1985년 연우무대의 일원이 되었다.

그를 ‘거리’로 불러낸 것

<사진=뉴시스>
문성근은 첫 작품인 ‘한씨 연대기’를 통해 데뷔했고 이 작품으로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아버지(문익환 목사)와 숙부(문동환 목사)가 예술적인 감각을 지닌 신앙활동을 했기 때문에 자신이 집안의 예술적 DNA를 지니고 태어났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후 ‘칠수와 만수’, ‘변방에 우짖는 새’ 등의 연극활동을 하던 그는 연극보다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면에 있어서 높은 효율성을 가지고 있던 영화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같은 연우무대 출신인 박광수 감독의 도움으로 ‘그들도 우리처럼’이라는 작품으로 영화계에 뛰어든 그는 이후 ‘경마장 가는 길’, ‘너에게 나를 보낸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초록물고기’, ‘오! 수정’ 등의 수많은 영화에 출연해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영화배우로 주가를 올리던 1992년, SBS 간판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 진행을 맡는다.

그의 지적인 이미지와 호소력 짙은 목소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문성근 진행 당시의 <그것이 알고 싶다>는 평균 시청점유율 40%를 넘길 정도로 많은 인기를 끌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던 그가 사회문제에 한걸음 내딛게 된 계기는 영화계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던 ‘스크린쿼터’ 문제였다.

문성근은 연기에 집중하겠다는 생각으로 스크린쿼터 투쟁에 조금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영화계에서 ‘문화는 약하니까 지켜달라’고 말하는 논리가 옹색하게 느껴졌다.

무역학과 출신에 8년간 업무 경력도 있었던 그는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쿼터제도가 수출입과 독과점에 관련된 문제라는 내용의 글을 작성했고, 이 글을 이창동 감독이 첨삭해 ‘씨네 21’독자 투고란에 싣게 된다. 이를 계기로 문성근은 ‘스크린쿼터’ 시위 현장에 서게 됐다.

노무현과의 인연

그의 인생에서 故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은 하나의 반환점이었다, 그 인연이 없었다면 그는 여전히 평범한 한 명의 배우로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약칭 노사모) 활동을 시작한 것은 동료배우이자 친구인 명계남의 권유에 따른 것이지만 노무현과의 첫 만남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9년 아버지 문익화 목사 방북사건 직후 구성된 공동변호인단에 당시 DJ가 이끌던 평화민주당 소속 정치인들 밖에 없어 모양새가 너무 좋지 않다는 생각에 YS의 통일민주당에 있던 노무현 의원을 찾아가 부탁했더니 단번에 “아! 합시다”하며 받아들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2002년 대선 당시, 민주당에서 버림받은 국민후보 노무현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개혁국민정당 창당발기인대회에서 ‘노무현’을 부르짖던 문성근의 목소리와 그 연설을 들으면서 떨궈진 노무현의 눈물 한방울은 한 시대를 상징하는 영상물로 기억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조문객을 맞이하던 문성근씨가 눈물을 훔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문성근은 대선 당시 전국 선거유세 현장을 다니면서 노무현 지지연설을 이어갔고, 사비를 털어 선거캠프에 고가의 영상카메라까지 사서 갖다 주는 등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 되더라도 그 어떤 혜택도 보지 않겠다고 공언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입각설부터 총선 출마설까지 수많은 설이 난무 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모습이 언론에 비춰지는 것조차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생각에 그는 작품 활동도 접은 채 노 대통령의 5년 임기 동안 산에만 다녔다.

노 대통령이 퇴임 후 그를 불러 ‘정치를 해보지 않겠냐’고 넌지시 권하기도 했지만 문성근은 그것조차 고사했다. 자신의 길은 ‘배우’라는 것이었다. 그랬던 그가 긴 잠을 깨고 민란군의 수장을 자처하며 대중들 앞에 다시 나타났다.

민란 그리고 들불

문성근이 제안하고 있는 유쾌한 민란은 시민의 힘으로 민주·진보진영을 하나의 정당으로 묶어 내자는 것이다. 이후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민주정부를 다시 세우고 이를 장기집권으로 이어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민주·진보진영의 정당 및 정치인, 그리고 시민사회세력과 깨어있는 시민들에게 제3지대에서 모두 같이 만나 백지상태에서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야권 단일정당’ 건설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1월 19일 김대중 도서관에서 열린 백만민란 아고라 국/민/野/단에서 연설하고 있는 문성근. <사진=국민의 명령 홈페이지 제공>

유사점을 지니고 있는 ‘후보단일화’는 이미 야권에서 많이 진행되어 왔지만 지난해 은평을 재보궐선거나 6·2지방선거에서 일부 드러난 것처럼 ‘단일화’를 통한 표결집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점을 정치권에서도 인식하고 있다.

유쾌한 민란 프로젝트 제안서에서 문성근은 “6·2지방선거나, 7·28재보궐 선거에서 소위 ‘연대’ 또는 ‘후보단일화’를 했지만 그것은 최적의 후보를 찾을 수 있는 방안도 아닐뿐더러 찾았다 하더라도 탈락한 후보가 속한 정당의 구성원들이 선거운동을 내 일처럼 하지 않기 때문에 최선의 길이 아니”라며 ‘연합정당’론을 주장하고 있다.

문성근이 말하는 연합정당은 당론을 강제하지 않고 합의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합의해 의견을 조율하고, 합의되지 않는 부분은 하나의 ‘정파’로서 경쟁하는 연합체를 통해 ‘결선투표제’가 없는 우리나라 선거법의 한계를 극복하는 ‘예선투표’를 하자는 것이다.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창조한국당, 국민참여당, 사회당 등 현재 6개로 나뉘어져 있는 야당들이 민주·진보라는 이름 아래 ‘연합정당’을 구성해 안에서 예선투표를 통해 후보를 내면 현재와 같이 독자존속을 할 때보다 당선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당과 정치에 대한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문성근은 자신이 아무런 정파에도 소속된 적이 없다는 점과 함께 문화예술적 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구상 초기에 이창동 감독, 조기숙 교수 등과 함께 논의했지만 이 안을 대중적으로 알릴 수 있는 사람이 문성근 자신 밖에 없었기에 혈혈단신 거리로 나섰고, 그렇게 그는 80여일째 겨울 칼바람을 뚫고 전국을 누비며 시민들 한명 한명을 만나 ‘유쾌한 민란’을 알리고 있다.

현재 ‘유쾌한 민란’의 온라인 집결지인 국민의 명령 홈페이지에는 약 7만명이 회원가입을 하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사진=국민의 명령 홈페이지 제공>

단순 가입에서 멈추지 않고 각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열성회원들에게는 ‘들불’이라는 애칭이 붙여지는데, 이 들불들은 매주 1회 꼴로 각자가 속한 지역에서 시민들에게 ‘유쾌한 민란’을 설명하고 회원을 모으는 민란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故 노무현 대통령의 말처럼 이 깨어 있는 시민들은 또 다른 깨어 있는 시민들을 조직하는 활동을 진행하며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문성근과 깨어있는 시민들인 ‘들불’ 들이 함께 하는 ‘유쾌한 민란’이 이들의 희망처럼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다시 한 번 민주정부를 수립하는데 기반이 될 수 있을지 그 앞길이 주목된다.

▲ 시민들에게 '유쾌한 민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문성근. <사진=국민의 명령 홈페이지 제공>

‘민란’ 꿈 꾸며 유쾌하게 간다

“1분만 이야기하겠습니다. 너무 짜증나서 나왔습니다”

기자가 문성근을 처음 만난 건 지난해 12월 구리시에서 진행된 ‘유쾌한 민란’ 행사에서였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지만 날씨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그는 우비를 입고 핀 마이크를 꽂은 채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배우 문성근입니다. 오늘은 촬영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 시민운동 하러 나왔습니다. 1분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너무 짜증나서 나왔습니다. 분열된 야당을 묶어서 한나라당과 맞장을 떠야 합니다. 2012년 총선에서 야권 단일정당을 만들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진=송병승 기자>

그는 사거리를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자신이 ‘유쾌한 민란’을 진행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다. 약 두 시간동안 시민들에게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는 딱 10여분 동안 휴식을 가졌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우비와 젖은 옷을 갈아입기를 두어 차례. 그러면서도 그는 핀 마이크를 놓지 않고 쉼 없이 시민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했다.

많은 시민들이 가는 길을 잠시 멈추고 준비해 놓은 부스 안으로 들어와 ‘유쾌한 민란’ 회원가입 신청서를 작성했다.

이날 ‘유쾌한 민란’ 신청서를 작성한 20대 정모씨는 “현 정권이 너무 서민을 위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정부 재정 또한 위기에 놓여 있는데 4대강 사업에 예산 퍼붓기를 일삼고 있다”면서 “행동의 부재로 야당의 참여가 미비한데 문성근씨가 앞장서서 이를 추진하고 있는 것에 이전부터 함께하고 싶어서 이렇게 반겨주러 나오게 되었다”며 작성 이유를 설명했다.

문성근의 ‘유쾌한 민란’은 그 혼자만이 진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신청서를 작성하고 홈페이지에 회원가입을 하는 시민들도 있지만 문성근의 생각에 동조해 그와 함께 ‘유쾌한 민란’을 도우며 함께 지역에서 시민들에게 생각을 전달하고 있는 ‘들불’들이 활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회원 가입을 접수하던 신동호(50)씨는 “모든 사람이 회원으로만 남아 있을 수는 없기에 같은 뜻 같은 마음을 가지고 이곳에 나와 회원 가입을 받고 있다”며,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문성근씨가 대신해서 해주고 있기 때문에 작은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 나왔다”고 참여 이유를 설명했다.

2012년 총선에서 첫 선거를 한다는 고등학생 김연태(18)군은 “좋은 정치 바른 정치를 해야 하는데 지금 어른들은 그런 것 같지 않다”며 “첫 투표에서 꼭 좋은 사람을 뽑고 싶어 이 자리에 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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