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이한듬 기자] 말보로와 버지니아슬림 등의 양담배 제조사로 유명한 필립모리스인터내셔널의 한국 법인인 한국필립모리스가 국내의 한 창고임대업체로부터 명도소송 피소를 당해 그 배경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국필립모리스(이하 필립모리스)는 경남 양산에 위치한 창고임대사업자 (주)석암(이하 석암) 소유의 토지와 창고를 임대해 제조공장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공장 부지 안에서 무단으로 구조변경·증축 등을 벌여오다 석암으로부터 소송을 당한 것이다.
석암 “명백한 무단증축, 계약 위반…나가라”
vs
필립모리스 “서면동의 조항에 ‘사전’ 단서 없어”
필립모리스와 석암이 해당 창고 임대계약을 맺은 것은 2001년이었다. 2010년 3월 석암 측이 필립모리스의 공장시설 무단개조 및 불법 증축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기 전까지 양쪽의 관계는 일반적인 임차인과 임대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무단 구조변경 사실을 알게 된 석암 측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확인하기 위해 공장을 방문하려 했으나 필립모리스 측은 석암 측이 공장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극구 거부했고, 실랑이 끝에 이뤄진 방문에서도 ‘사진촬영’ 문제로 시비가 붙어 내부를 볼 수 없었다.
석암 측은 필립모리스 측에 영업비밀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구조변경 등의 부분에 대한 촬영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됐고, 육안확인만 한 후 문제가 되는 부분의 내역을 작성해달라고 한발 물러섰으나 이마저도 거절당했다.
계속해서 출입을 거부하는 필립모리스에게 화가 난 석암은 이날 공장을 나온 후 곧바로 ‘계약서에 따른 의무불이행으로 인한 계약해지 사유 발생’ 법정조치통보서를 발송하는 한편 양산시청에도 무단 증축에 대한 민원을 제기했다.
시청 관계자가 나서자 필립모리스는 공장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세부적인 구조변경 내용에 대한 확인은 할 수 없었고, 공장 부지에 무단으로 세워져있던 컨테이너가건물을 철거하라는 시정조치만이 내려졌다고 한다.
이와 함께 필립모리스는 오히려 석암 측에 정문 앞에 차를 세워놔 공장차량출입을 봉쇄, 영업에 지장을 초래했다는 통지문을 보냈다.
영업방해 주장도 어이없었지만 석암 측을 더욱 분노하게 만든 부분은 필립모리스가 당시 상황을 몰래 사진으로 찍고 녹취했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해 5월7일 석암이 법원에 필립모리스를 상대로 출입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자 필립모리스 측에서 제출한 반박 서류를 통해 드러났다.
석암 관계자는 “우리가 마치 고의적으로 영업을 방해한 것처럼 꾸밀 수 있도록 처음부터 함정을 파놓고 준비해 놓은 것”이라고 분개했다.
결국 법정으로…
공장 내부의 구조변경 및 개조·개량된 부분이 당초 석암의 예상보다 훨씬 많았고, 필립모리스는 이를 숨기기 위해 그토록 완강하게 출입을 거부했다는 것이 석암 측의 주장이다.
석암측은 조사 내용을 토대로 진단서를 작성해 7월13일 필립모리스 측에 “안전조치를 포함한 원상복구”를 요구했고, 답변이 없어 8월23일 또 한 차례 원상복구를 요구했지만 필립모리스 측은 끝내 석암 측의 요구를 거부했다.
결국 석암은 10월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토지인도 및 건물명도 청구’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뜬금없는 ‘이면합의’ 주장…진실은?
12일 서울중앙지법 566호에서 열린 첫 번째 공판에서 필립모리스가 내세운 논리는 “계약서 상에 ‘서면동의를 받아 구조변경을 할 수 있다’는 문구가 있고, 여기에 ‘사전’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이었다.
필립모리스 측은 특히 법정에서 “양자간에 임대료를 증액하기로 이면합의를 했다”는 새로운 주장을 제기했는데, 석암 측은 ‘증액 이면합의’는 없다고 일축했으나 재판부는 이에 대한 정확한 내용을 확인한 후에 양 측의 변론을 듣는 것이 낫겠다며 공판을 정회했다. 다음 2차 심리는 오는 3월15일로 예정됐다.
‘증액 이면합의’ 주장과 관련해 석암 관계자는 “두 업체 간의 갈등이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해 8월 17일, 마테오 펠레그리니 필립모리스 아시아 사장이 직접 한국으로 찾아와 향후 6개월간 월 임대료를 증액해 주겠다고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는 원상복구를 원한다며 증액 제의를 거절했고, 당시 통역을 맡은 사람이 필립모리스의 법률대리인이라 이 내용을 잘 알고 있을 텐데 양심도 없는 엉뚱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며 일부러 재판 진행 시간을 끌기 위한 필립모리스의 전술임을 의심했다.
“그저 예의를 원했을 뿐인데”
한편 이번 법정소송과 관련해 필립모리스 관계자는 “현재 진행 중인 소송에 대해 코멘트를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법정에서 우리의 입장을 모두 설명하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대응하겠다”고 말을 아꼈다.
필립모리스는 2012년을 목표로 양산공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공장신축을 진행하고 있다. 석암 측 관계자가 ‘시간끌기’를 의심하는 이유도 법정공방 시간을 최대한 끌어 신축 공장신축이 완공될 때까지 시간을 벌어보자는 속셈 때문 아니냐는 것이다.
공장신축이 예정되어있다는 말은, 양자간 계약이 ‘시한부’라는 말이고, 구조변경 사안에 대한 원상복구는 계약 만료 이전까지만 해도 되는 것 아니냐는 상식적인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얼핏 ‘감정싸움’으로도 비춰지는 양자간 갈등이 결국 법정으로까지 이어진 배경에 대해 석암 관계자는 “글로벌 기업이라는 필립모리스가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고, 계약서의 내용을 두고 말장난이나 하는 모습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소송을 진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한 업계 관계자는 “필립모리스의 본사가 있는 미국에서는 사소한 변경 내용 하나까지도 임대인의 동의를 받아서 진행하는 것이 ‘상식’인데, 유독 미국 기업들이 한국에만 오면 특혜를 바라고 국내법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