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한 잔하고 손자 놈 용돈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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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한 잔하고 손자 놈 용돈 줘야지”
  • 김종국 기자
  • 승인 2007.01.15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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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kg 자루 짊어지고 무가지 줍는 노인들…온 종일 모은 100kg, 단돈 만원

<매일일보>은 이번 호부터 총 3회에 걸쳐 ‘지하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연재한다. 빠르게 돌아가는 교통의 요지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무가지 줍는 노인들’, ‘노점상인들’, ‘가판대 직원들’의 얘기를 차례로 들어 본다. <편지자주>

희망찬 새해가 밝았지만, 무가지 신문을 줍는 노인들은 오늘도 힘겹게 전동열차에 몸을 싣는다. 얼어붙은 경기에 특별한 돈벌이 수단이 없는 노인들은 예년처럼 폐지 줍기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혹자는 매일같이 쏟아지는 4백만 부의 무가지가 일자리 없는 노인들에게 ‘효자’ 역할을 톡톡히 한다고 했다. 하지만 고령에 건강도 좋지 못한 노인들이 스스로 생계를 꾸리며 ‘하루 벌어 하루 살아야 하는’ 삶은 생각만큼 녹록찮다. 단돈 1만원을 위해 100kg에 가까운 포대자루를 끌고 ‘러시아워’ 전동차를 누비는 폐지 수거 노인들의 삶을 본지가 밀착 취재했다.

생계 위해, 용돈 위해 지하철에 몸 실어

출근 시간을 살짝 넘긴 오전 8시 35분, 인천행 1호선 전동열차의 한 객실에서는 무가지를 줍던 60대 남성과 20대 여성 사이에 실랑이가 오갔다.
선반위의 신문을 수거하다가 그만 신문 뭉치를 여성의 머리위로 떨어뜨린 것이다. 박모(66)씨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해 보지만 피해자인 이모(22)양은 좀처럼 화를 풀지 않았다. 보다 못한 한 아주머니가 이양을 달래면서 일단 급한 불은 껐다. 이에 박씨는 서둘러 폐지 자루를 짊어지고 다른 칸으로 이동했다.

서울역에서부터 쉴 새 없이 무가지를 자루에 주워 담는 박씨를 쫓은 지 한 시간 째. 전동차가 박씨의 종착지인 인천시 백운역에 닿았다. 새벽부터 모은 무가지는 50kg을 육박했다. 이 정도면 얼마를 벌 수 있냐고 묻자 박씨는 “기자양반이 안 따라다녔으면 70kg 정도는 모았을 것”이라며 “kg 당 90원이니까 4500원 정도”라고 말했다.

무가지 신문이 나오지 않는 주말을 제외하고 박씨는 이렇게 평일 오전 6시부터 9시 30분까지 1호선 전차 안을 누비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박씨는 2년 전 위암으로 아내를 잃으면서 ‘폐품 줍는 인생’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백운역 주위에서 폐신문의 절반 가격인 kg당 50원씩 하는 종이 박스를 리어카에 실어 고물상에 내다 팔았다. 하지만 ‘박스보다 신문이 돈이 된다’는 말에 솔깃해 박씨는 지난해 3월부터 오전에는 폐신문을 줍고 오후에는 박스를 줍는다.

독거노인으로 기초수급생활자 대상인 박씨는 매달 36만원의 정부 지원금과 폐품을 주워 판 20만원으로 빠듯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50만원에서 부인이 병상에 있을 때 진 빚과 월세비, 전기세, 전화세, 난방비 등 각종 세금을 제하면 박씨의 손에 남는 것은 고작 10여만 원. 그의 말대로 사는 게 고역이다.

슬하에 자식이 있을 법해 자식 얘기를 꺼냈더니 정색을 한 박씨는 “아들놈이 하나 있는데 그 놈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자신이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박씨, 지금하고 있는 이 일마저 못하게 될까봐 걱정이 크다며 자신의 집이 있는 언덕길로 올라갔다.

“내가 이런 일 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다음날 7시 30분. 출근길은 여전히 북새통. 승객들이 빼곡히 들어찬 2호선 순환 열차에 오른 최모(61ㆍ남)씨는 남들보다 먼저 버려진 무가지 신문을 확보하기 위해 승객이 가장 많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승객들 틈바구니를 이리 저리 뚫고 다닌다. 그리고 선반위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무가지를 모조리 등에 맨 가방에 담는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훔치며 최씨는 을지로3가에서 봉천역을 오가며 3시간 동안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오전 10시가 넘으면 이 장사도 끝. 다른 노인에게 무가지를 뺏기지 않으려면 한 시도 쉬어서는 안 된다. 다행히 기력과 체구가 좋아 남보다 폐지 수거가 용이하다.

간신히 모은 폐신문은 4자루, 90kg. 준비한 구루마를 이용해 최씨가 힘겹게 봉천역사 밖으로 자루를 옮겨놓자, 수거 나온 고물상 트럭이 그 앞에 서있다. 고물상 주인이 “수고했다”며 8천 5백원을 건네고 최씨는 지폐를 꼬깃꼬깃 접어 주머니에 구겨 넣는다. 수입의 용처가 궁금해 묻자 최씨는 “쇠주(소주) 한 잔하고 손자 놈 과자 한 봉다리 사줘야지”하고 말했다.

빡빡하게 살아가는 자식들에게 손을 내밀 수 없어 이 일을 시작했다는 최씨. 자식들로부터 몇 달째 용돈이 끊긴 상태다.

꼬깃꼬깃 접힌 천원 짜리 지폐에 손자 과자 한 봉

철도공사는 이 같은 불우 노인들의 폐지 수집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승객들과 노인들의 안전문제가 발생하고 지하철 이용객의 민원이 많다는 게 그 이유다. 이 때문에 자루를 빼앗으려는 역무원들과 노인들 사이에 몸싸움이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서울역사 관계자는 “박씨나 최씨 같은 노인이 1호선 구간에만 수백 명이 넘는 것으로 안다”면서 “다들 사정이 딱해서 심적으로는 이해하지만 복잡한 출근길에 그분들 때문에 피해를 당하는 승객들이 민원을 제기하고 있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무원들과 공익요원들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당장 먹고 살아야하는 노인들은 오늘도 지하철로 내몰리고 있다.
우리 사회는 IMF이후 고물 수집을 하는 노인들이 급격하게 증가했다고 한다. 단가가 높은 무가지 신문을 줍기 위해 지하철을 생존터로 삼은 가난한 노인들. 고령화 사회를 대비한 노인복지가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돼야 할지 짚어주는 대목이다.

김종국 기자<jayzaykim@sisa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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