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 그리고 法] 법조계에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
상태바
[法, 그리고 法] 법조계에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
  • 조민근 안심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 승인 2017.02.26 18: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민 법 감정과 실제 법 적용 괴리 줄어들 듯

[조민근 안심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예나 지금이나 주기별로 한 번씩 ‘국민 법 감정과 괴리가 큰 사법부 판단’으로 사회적 공분을 사는 사례가 종종 등장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상황에 변화를 예고하는 판례가 등장해 눈길을 끈다. ‘법, 그리고 법’ 첫 칼럼에서는 최근 사건들 가운데 사기죄 분야에서 나온 의미 있는 예를 들어 법조계 내에서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을 보여주고자 한다.

사기죄는 복잡한 사건인 만큼,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의 두 사례를 예로 들어본다. 친구 A와 B가 있다. A는 B에게 “네 땅을 담보로 1억원을 빌려주면 1년 안에 원금과 함께 연 20%의 이자를 상환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채권최고액 1억2천만원의 근저당권설정등기 서류에 B의 서명날인을 받고 이 서류를 이용해 대출을 받았다. 하지만 A는 약속과 달리 시간이 지나도 B에게 돈을 갚지 않았다.

C와 D 역시 친구 사이다. C는 D의 토지거래허가를 받아주겠다면서 필요한 서류에 서명해달라고 했다. D는 흔쾌히 서명날인을 했으나 이 서류는 C의 설명과 달리 D의 땅에 타인 명의의 근저당권을 설정하는 문서였다. C는 이 서류를 이용해 대출을 받고서는 그 대출금을 D에게 내주거나 갚지 않았다.

종전 판례에 따르면 위 두 사례의 A와 C는 재산범죄 성립 여부에 큰 차이를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A에게는 사기죄가 인정되지만, C에게는 아무런 재산범죄도 인정되지 않는다. A와 C 모두 피해자를 기망해 착오에 빠뜨린 후 재산상 이익을 취했다는 점에선 같지만, C 사건은 이후 설명할 사기죄 성립 요건 중 하나인 '피해자의 처분행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이 같은 결과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최근 대법원에서는 대단히 의미 있는 판결이 나와 시선을 끈다. 대법원이 올해 2월 16일 선고한 2016도13362 판결의 사실관계는 다음과 같다.

「피고인 등은 피해자들에게 토지거래허가에 필요한 서류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피해자들로 하여금 근저당권 설정계약서 등에 서명·날인 하게 한 다음, 위 피해자들로부터 받은 인감증명서를 이용하여 피해자들 소유의 토지에 피고인을 채무자로 하여 채권최고액 10억5천만원의 근저당권을 대부업자 등에게 설정한 후 7억원을 차용(이하 생략)」

이 사건은 C의 사례와 유사하다. 피고인(C)이 피해자(D)를 상대로 처분문서의 의미를 속여 서명·날인을 사취한 후 피해자 몰래 재산상 손해를 끼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종류의 사건에서 사기죄가 인정되느냐 마느냐는 피해자의 처분행위 유무에 따라 갈리는 경우가 많다.

사기죄는 △타인을 기망할 것 △상대방이 기망으로 착오에 빠질 것 △피기망자가 착오에 빠진 상태에서 처분행위를 할 것 △그로 인해 피해자에게 재산상 손해가 발생하고 기망자는 재물이나 재산상 이익을 취득할 것이라는 요건이 갖추어질 때 성립한다.

종전의 대법원 입장은 ‘사기죄에서의 처분행위란 재산적 처분행위를 의미하고 그것은 주관적으로 피기망자에게 처분의사 즉, 처분결과에 대한 인식이 있고, 객관적으로는 이러한 의사에 지배된 행위가 있을 것을 필요로 한다’였다. 피해자가 피고인의 거짓말에 속아 착오에 빠졌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행하는 처분결과를 인식하지 못하면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위의 C 상황을 예로 들면, 피해자 D는 토지거래허가신청서에 서명날인한 것만이 그의 의사였고, 실제로 발생한 결과인 근저당권 설정에 관한 부분은 인식하지 못했으므로 ‘처분행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았던 것이다.

처분행위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사기죄와 절도죄를 구별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절도죄는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에 대한 피해자의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재물을 취득하는 것’이고, 사기죄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거짓말에 속아 스스로 재물이나 재산상 이익을 내어주는 것’이다. 종래의 판례는 ‘처분의 결과를 인식하지 못했다면 피해자가 스스로 재물이나 재산상 이익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므로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여담이지만 C는 절도죄도 인정되지 않는다. 절도죄의 객체는 재물인데, C가 얻는 이익은 부동산이라는 재물이 아닌 대출로 인한 재산상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결국 종전판례에 따르면 C는 적어도 재산범죄에 관해서는 무죄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2016도13362 판결에서 대법원은 입장 변화를 보였다. 처분 결과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경우에도 처분행위를 인정한 것이다. 대법원 판결은 다음과 같다.

「사기죄의 본질과 그 구조, 처분행위와 그 의사적 요소로서 처분의사의 기능과 역할, 기망행위와 착오의 의미 등에 비추어 보면, 비록 피기망자가 처분행위의 의미나 내용을 인식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피기망자의 작위 또는 부작위가 직접 재산상 손해를 초래하는 재산적 처분행위로 평가되고, 이러한 작위 또는 부작위를 피기망자가 인식하고 한 것이라면 처분행위에 상응하는 처분의사는 인정된다. 다시 말하면 피기망자가 자신의 작위 또는 부작위에 따른 결과까지 인식하여야 처분의사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판시 내용과 같이 사기사건에서 피기망자의 처분의사는 ‘기망행위로 착오에 빠진 상태에서 형성된 하자 있는 의사’이므로 불완전하거나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처분행위의 법적 의미나 경제적 효과 등에 대한 피기망자의 주관적 인식과 실제로 초래되는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고, 이 점이 사기죄의 본질적 속성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판결은 ‘갈수록 교묘해지는 사기 수법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사법부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같은 사법부의 의지는 일반인의 법 감정과 실제 법 적용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법조인의 한 사람으로서 앞으로도 사법부의 합리적인 변화가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