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대한제국 2대 순종효황제 · 순명효황후 · 순정효황후 유릉(裕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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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대한제국 2대 순종효황제 · 순명효황후 · 순정효황후 유릉(裕陵)
  • 김종혁 기자
  • 승인 2016.09.01 0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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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 하나에 세 분을 모신 '동봉삼실 합장릉' 형식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유릉은 대한제국 2대 순종효황제, 첫 번째 황후 순명효황후 민씨와 두 번째 황후 순정효황후 윤씨의 능이다.

사실적으로 조각된 유릉 석물. 당시 우리나라에 없던 코끼리와 쌍봉낙타도 석물군에 배치했다.

유릉은 합장릉의 형태로 한 봉분 안에 세 분을 같이 모신 동봉삼실 합장릉의 형태이다.

침전 앞 유릉 석물군 전경

유릉은 홍릉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조선왕릉을 계승하고 명나라의 황제릉을 인용한 대한제국의 황제릉으로 조성햇다. 홍릉에 비해 능역 규모가 좁지만, 석물의 조각이 사실적이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을 설치했다.

제향공간에는 침전, 석물, 비각, 홍살문을 세웠다. 비각에는 1개의 능표석이 있는데 ‘대한 순종효황제 유릉 순명효황후 부좌 순정효황후 부우’라고 써있다.

능의 역사

처음 순명효황후 민씨가 1904년(광무 8년)에 세상을 떠나자, 양주 용마산(현 어린이대공원)에 유강원(裕康園)을 조성했다.

순종이 등극한 후 유강원은 유릉으로 추봉됐으며, 순종이 1926년에 세상을 떠나자 용마산에 있던 유릉을 홍릉 왼쪽 언덕으로 천장하는 것이 결정되고 산릉공사를 했다.

이후 순명효황후를 먼저 모시고, 순종을 합장으로 모셨다. 그 후 순정효황후 윤씨가 1966년에 세상을 떠나자 유릉에 합장으로 조성했다.

조선왕릉 의궤에 따라 정자각이 배치되던 형식과 다르게 대한제국 이후는 침전을 능침 앞에 배치하고 능 주변에 설치했던 석물은 외부에 조성하는 형식을 취했다. 사진은 유릉 침전으로 침전안에서 창문을 열면 능침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사진=문화재청 제공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 이야기

순종효황제(1874~1926년, 황제재위 : 1907~1910)는 고종태황제와 명성태황후 민씨의 둘째 아들로 1874년(고종 11년)에 창덕궁 관물헌에서 태어났다.

바로 다음 해에 왕세자로 책봉됐고, 1897년(광무 1년)에 황태자로 책봉됐다. 1907년(광무 11년)에 일본의 압박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되자 대한제국의 두 번째 황제로 등극하고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등극 후 일본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강제로 체결됐고, 1909년(융희 3년)에는 기유각서가 강제 체결돼 사법권을 강탈당했다.

결국 1910년(융희 4년)에 친일파에 의해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돼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그 후 이왕(李王)으로 강등돼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1926년 양력 4월 25일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구차히 산 지 17년, 2천만 생민(生民 : 국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다. 지금의 병이 위중하니 한 마디 말을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백성들이 분명히 알게 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백성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어둠 속에서 여러분을 도우리라. ]

1926년 4월 25일 새벽 6시 15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53세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위와 같은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신문에는 '5백 년 종사의 마지막 황상(皇上) 승하'라는 제목의 기사가 전면을 장식했다. 그 해 6월 10일 발인하는 날, 순종의 발인 행렬이 유릉을 향해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단성사 앞을 지날 때였다.

황제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러 나온 수많은 군중 속에서 수천 장의 격문이 날아오르며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 황제의 인산일을 기하여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순종의 마지막 유언을 백성들이 알 리 만무했으나, 마지막 황제의 죽음은 백성들의 독립에 대한 욕망을 더욱 고조시키게 된 것이다.

한 봉분에 세 분을 모신 유릉은 동봉삼실 형식으로 조성됐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에서 일본에 의해 이왕(李王)으로 강등됐던 순종황제 유릉 능침전경.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이야기

순종의 첫 번째 황후 순명효황후 민씨(1872~1904는 본관이 여흥인 여은부원군 민태호와 진양부부인 송씨의 딸로 1872년(고종 9년)에 양덕방 계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882년(고종 19년)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됐고, 1897년(광무 1년)에 황태자비로 책봉됐다. 그러나 순종 등극 전인 1904년(광무 8년)에 경운궁(덕수궁) 강태실에서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1907년(융희 1년)에 순종 등극 후 순명황후로 추존됐다.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이야기

순종의 두 번째 황후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는 본관이 해평인 해풍부원군 윤택영과 경흥부부인 유씨의 딸로 1894년(고종 31년)에 양근 서종면 외가(현 양평군)에서 태어났다.

1907년(광무 10년)에 황태자비로 책봉됐고, 같은 해에 순종이 등극하자 대한제국 최초의 황후로 책봉됐다. 황후는 한일합방체결을 반대해, 병풍 뒤에서 옥새를 치마속에 감추고 어전회의를 듣고 있다가 백부 윤덕영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결국 1910년(융희 4년) 한일합병조약 체결되면서 이왕비(李王妃)로 강등돼 창덕궁에 거처하게 됐다.

일제의 침략행위를 경험했고, 광복과 한국전쟁을 겪었어도 대한제국의 황후로서 품위를 잃지 않았다.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했다가 1966년 양력 2월 3일에 창덕궁 낙선재에서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1950년, 순정효황후는 한국전쟁 당시에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창덕궁에 남아있었는데, 이때 인민군들이 창덕궁에 들이 닥쳐 행패 부리는 것을 보고 크게 호통을 쳐서 내보냈다고 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로서 당당함과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자료,사진출처=문화재청,조선왕릉관리소,공공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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