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조선 제25대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 예릉(睿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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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조선 제25대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 예릉(睿陵)
  • 김종혁 기자
  • 승인 2016.08.28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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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예릉은 조선 25대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 김씨의 능이다.

하나의 곡장 안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철종장황제, 오른쪽이 철인장황후의 능이다.

예릉은 '국조오례의'와 '국조상례보편'에 의거한 마지막 조선왕릉의 형태로 조성했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돼 있다.

향로와 어로는 일반적인 조선왕릉의 향로와 어로와 달리 향로 양 옆으로 어로를 깔았는데, 이후 고종의 홍릉(洪陵)과 순종의 유릉(裕陵)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했다.

예릉의 문무석인과 석마, 장명등, 석양과 석호 일부는 중종의 구 정릉(靖陵)의 석물을 다시 사용한 것으로, 정릉(靖陵)을 서울 강남으로 천장할 때 석물을 묻었다가 다시 꺼내 사용했다.

장명등은 문석인 가운데가 아닌 능침 앞쪽으로 배치한 것이 특이한데, 이는 조선시대 유일한 배치방법이다.

능의 역사

1863년(철종 14년)에 철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64년에 고양 희릉(禧陵) 오른쪽 언덕인 구 정릉(靖陵) 자리에 능을 조성했다.

이후 철인장황후 김씨가 1878년(고종 15년)에 세상을 떠나자 예릉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했다.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 이야기

철종장황제(1831~1863)은 장조(사도세자)의 손자인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 염씨의 아들로 1831년(순조 31년)에 경행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철종의 할아버지는 은언군으로 장조(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은언군은 정조 즉위 후 역모 사건에 휘말려 강화도에 유배됐다가 1801년(순조 1년)에 신유박해사건 때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사됐다.

이후 순조는 1830년(순조 30년)에 은언군의 가족을 방면했고, 은언군의 아들 전계대원군이 1831년(순조 31년)에 철종을 낳았으나, 헌종 즉위 후에 역모사건으로 다시 강화도에 유배됐다.

계속 강화도에서 생활하다가 1849년에 헌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순원숙황후의 명으로 순조의 양자로 입적돼 왕위에 올랐다.

즉위 처음에는 순원숙황후의 수렴청정을 받아 국정을 운영했고, 1851년(철종 2년)부터 친정(親政)했다. 헌종 대에부터 시작된 삼정(三政 :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극에 달해 진주민란을 비롯한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삼정이정청(三政釐政廳)이라는 특별 기구를 설치해 삼정의 문란을 수습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안동 김씨의 세도로 인해 국정을 바로 잡지 못했다. 그 후 1863년(철종 14년)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 2년)에 철종장황제로 추존됐다.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이야기

철인장황후 김씨(1837~1878)는 본관이 안동인 영은부원군 김문근과 흥양부부인 민씨의 딸로 1837년(헌종 3년)에 순화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851년(철종 2년)에 왕비로 책봉됐고, 1858년(철종 9)에 원자를 낳았으나 일찍 죽는 비운을 겪었다.

철인장황후는 안동 김씨 출신의 왕비였지만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고, 말수가 적고 성품이 온화했다고 한다.

철종이 세상을 떠나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순대비(明純大妃)가 됐으며, 1878년(고종 15년)에 창경궁 양화당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 2)에 철인장황후로 추존됐다. <자료,사진출처=문화재청,조선왕릉관리소,공공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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