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 17대 임금 효종(孝宗)과 인렬왕후 영릉(寧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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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 17대 임금 효종(孝宗)과 인렬왕후 영릉(寧陵)
  • 김종혁 기자
  • 승인 2016.08.08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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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조선 제 17대 임금 효종대왕(1619~1659)과 인렬왕후는 경기도 여주 영릉(寧陵)에 묻혔다. 효종(孝宗)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이며, 비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효종은 1619년 서울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에서 태어났고, 1631년 12세에 장씨와 혼인했으며, 1626년(인조 4년)에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다.

효종대왕릉 재실 일곽 전경 사진=문화재청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했으나 이듬해 삼전도의 굴욕과 함께 강화가 성립되자, 형 소현세자(昭顯世子) 및 척화신(斥和臣)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청나라에 있는 동안 형 소현세자를 적극 보호했다고 전해진다.

즉, 청나라가 산해관(山海關)을 공격할 때 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고 자기를 대신 가게 해달라고 고집해 동행을 막았으며, 그뒤 서역(西域) 등을 공격할 때 세자와 동행해 그를 보호했다.

청나라에서 많은 고생을 겪다가 8년 만인 1645년 2월에 소현세자가 먼저 돌아왔고, 그해 4월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자 5월에 돌아와 9월에 세자로 책봉됐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했다.

효종의 북벌계획

효종은 오랫동안 청나라에 체류할때 서쪽으로는 몽고, 남쪽으로는 산해관, 금주위 송산보(錦州衛松山堡)까지 나아가 명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직접 경험했고, 동쪽으로는 철령위(鐵嶺衛)·개원위(開元衛) 등으로 끌려다니며 갖은 고생을 했다. 청나라에 원한을 품고 조정의 배청(排淸) 분위기와 함께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했다.

즉위후 청나라와 연결된 김자점(金自點) 등 친청파(親淸派)를 파직시키고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대청(對淸) 강경파를 중용해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김자점 일파와 역관배(譯官輩)인 정명수(鄭命壽)·이형장(李馨長) 등이 청나라와 은밀히 연결돼 있어 이들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졌다. 그 결과 즉위초에는 왜정(倭情)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남방지역에만 소극적인 군비를 펼 뿐 적극적인 군사계획을 펼 수 없었다.

조선에 대해 강경책을 펴던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多爾袞)이 죽자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태도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이용해 1651년(효종 2년) 12월 이른바 조귀인(趙貴人:인조의 후궁)의 옥사를 계기로 김자점 등의 친청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고, 청나라에 있던 역관배들도 거세한뒤 이듬해부터 북벌을 위한 군비확충을 본격화했다.

1652년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 강화하고, 금군(禁軍)을 기병화하는 동시에 1655년에는 모든 금군을 내삼청(內三廳)에 통합하고 군사를 늘려 왕권강화에 노력했다.

또한,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하는 수어청을 강화해 서울 외곽의 방비를 강화 했다. 중앙군인 어영군을 2만, 훈련도감군을 1만으로 늘리고자 했으나 재정문제로 실패했다.

이밖에, 1654년 3월에는 지방군의 핵심인 속오군(束伍軍)의 훈련을 강화하기 위해 인조 때 설치됐다가 유명무실화된 영장제도(營將制度)를 강화하는 동시에 1656년에는 남방지대 속오군에 보인(保人)을 지급해 훈련에 전념토록 했다.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hamel, h.) 등을 훈련도감에 수용해 조총·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 보수하고 이에 필요한 화약을 얻기 위하여 염초(焰硝)생산에 노력했다.

이와같은 효종의 군비확충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국세가 이미 확고해져 북벌의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다. 다만, 군비확충의 성과는 두 차례에 걸친 나선정벌에서만 효과를 봤다.

효종대왕능침

효종은 평생을 북벌에 뜻을두고 군비확충에 전념한 군주였으나 정세가 호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부족해 때로는 북벌보다 현실적인 경제재건을 주장하는 조신(朝臣)들과 뜻이 맞지 않아 북벌을 이루지 못했다.

1659년 5월 41세를 일기로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선문장무신성현인대왕(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의 존호(尊號)가 올려지고, 묘호(廟號)를 효종이라 했다.

그해 10월 능호를 영릉(寧陵)이라 하고, 경기도 양주의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장사했으나 뒤에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로 옮겼다. <자료,사진출처=문화재청,공공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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