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 11대 임금 중종 정릉(貞陵)과 단경왕후 온릉(溫陵)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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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 11대 임금 중종 정릉(貞陵)과 단경왕후 온릉(溫陵) <상>
  • 김종혁 기자
  • 승인 2016.07.27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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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능 파헤쳐지고 재궁 화재로 불타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조선 제 11대 임금 중종(中宗)과 세 왕비 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능침은 따로 모셔져 있다. '조선왕릉을 만나다' 중종편은 <상><하>로 나누어 게재한다.

중종 정릉(靖陵) 3m 가넘는 크기의 석물과 능침 전경 사진=문화재청

능의 구성

정릉은 단릉의 형식으로 조선 11대 중종(中宗)한 분을 모신 능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돼 있다. 능침은 선릉과 같이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석양과 석호의 전체적인 자세는 선릉과 비슷하면서도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조금 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문무석인은 높이가 3m가 넘을 정도로 큰 편이며, 얼굴의 퉁방울눈이 특이하며 코 부분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있어 정릉의 수난을 상기시켜 준다.

능의 역사 -임진왜란 때 능 파헤쳐지고 재궁 화재-

1544년(중종 29년)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545년에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고 능호를 정릉(靖陵)이라 했다. 그러나 17년 후인 1562년(명종 17년)에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씨에 의해서 중종의 능을 선릉 부근으로 옮겼다.

문정왕후는 봉은사 주지였던 보우와 논의해, 중종의 능침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으므로 선릉 동쪽 언덕이 풍수상 길지라 하여 옮겼으나, 지대가 낮아 비가 오면 홍수 피해가 자주 있던 자리였다.

결국 중종과 함께 묻히기를 바랐던 문정왕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태릉(泰陵)에 능을 조성했다. 그 후 정릉은 임진왜란 때 선릉과 함께 왜구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중종(中宗) 이야기

중종(1488~1544)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로 1488년(성종 19년)에 태어났다. 1494년(성종 25년)에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해졌고,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중종반정은 1506년 박원종이 성희안, 유순정, 신윤무 등과 함께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들어  일으킨 정란이다. 그들은 밀약 후 연산군이 유람하는 날을 기해 거사하기로 계획을 꾸몄다.

1506년 9월 1일, 반정 세력들은 훈련원에 무사들을 집결시켰다. 훈련원을 출발한 반정세력은 창덕궁 어귀의 하마비동에서 유순, 김수동 등을 만나 함께 진을 치고 경복궁에 있는 대비(정현왕후 윤씨)에게로 가서 거사의 사실을 알렸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대비는 반정을 일으킨 신료들의 요청이 계속되자 연산군 폐위와 진성대군의 추대를 허락하는 교지를 내렸다. 교지를 받은 반정 주도세력들은 먼저 권신 임사홍, 신수근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창덕궁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가담하게 했다.

이튿날인 9월 2일,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창덕궁에 들어가 연산군에게 옥새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사태가 기울었음을 안 연산군은 옥새를 내줬고, 반정군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 도착한 진성대군은 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왕위에 올랐다.

중종은 연산군대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새로운 개혁정치를 표방한 조광조를 내세워,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사림을 등용했으나, 소격서 폐지, 위훈삭제 등 급진적인 정책이 큰 반발을 불러와 기묘사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향약이 전국적으로 실시돼 유교적 향촌질서가 자리를 잡았으며, 인쇄술의 발달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많은 서적이 편찬됐다.

경제적으로도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했으며, 사치를 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544년(중종 39년)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제11대 중종 첫 번째 왕비 단경왕후 온릉(溫陵)

능의 구성

단경왕후 온릉(溫陵)문석인

온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첫 번째 왕비 단경왕후 신씨의 능으로 단릉의 형식이다. 1739년(영조 15년)에 단경왕후가 복위되면서 조선 후기의 추존왕비릉 제도로 새롭게 조성했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돼 있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했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1쌍과 석호 1쌍을 배치했다.

능의 역사

중종의 폐비 신씨가 1557년(명종 12년)에 세상을 떠나자 친정집안인 거창 신씨의 묘역에 묘를 조성했다. 이후 1739년(영조 15년)에 복위돼 능호를 온릉(溫陵)이라 하고 정릉(貞陵)과 사릉(思陵)의 예에 따라 새롭게 조성했다.

단경왕후(端敬王后) 이야기

단경왕후 신씨(1487~1557)는 본관이 거창인 익창부원군 신수근과 청원부부인 한씨의 딸로 1487년(성종 18년)에 태어났다. 1499년(연산 5년)에 성종의 아들인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려 부부인이 됐으며,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됐다.

그러나 연산군의 처남 이었던 단경왕후의 아버지가 중종반정을 반대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려 왕비 책봉 7일 만에 폐위됐다.

1515년(중종 10년)에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폐비 신씨의 복위론이 있었으나 무산됐고, 1557년(명종 12년)에 사저에서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지 182년이 지난 1739년(영조 15년)에 복위되어 시호를 단경왕후라 하고, 신주를 종묘에 부묘했다. <자료,사진 출처=문화재청,공공누리집,조선왕릉관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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