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제9대 임금 성종, 정현왕후 선릉(宣陵) 공혜왕후 순릉(順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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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제9대 임금 성종, 정현왕후 선릉(宣陵) 공혜왕후 순릉(順陵)
  • 김종혁 기자
  • 승인 2016.07.22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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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선릉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 가운데 문무석인과 난간석 조각이 아름답고 섬세하다. 첫 부인 공혜왕후는 경기도 파주 삼릉중 순릉에 모셨고 둘째부인 정현왕후가 선릉에 성종과 함께 모셔졌다.

능의 구성

선릉 정현왕후 문석인

선릉은 조선 9대 성종과 왕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다.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봤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성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정현왕후의 능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이 배치돼 있다.

성종의 능침은 '국조오례의'의 예를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 등을 배치했다.

정현왕후의 능침은 병풍석만 생략했을 뿐 성종의 능침과 같은 형태다. 난간 석주의 윗부분에는 초기 난간석의 부드러운 맛이 그대로 남아 있고, 문무석인은 윤곽과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능의 역사

성종 선릉능침 병풍석과 난간석 이하사진=문화재청

1494년(성종 25년)에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95년에 광주 학당리(현 선릉)에 능을 먼저 조성했다.

원래 이 자리는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묘역이 있던 자리였으나, 선릉이 조성되면서 광평대군묘역은 현재 강남구 수서동으로 이장됐다.

그 후 1530년(중종 25년)에 성종의 왕비 정현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선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했다. 선릉은 유독 수난을 많이 겪었다.

임진왜란 때 파헤쳐지는 수난 겪어

그 첫 수난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년)에 일어났다.  '선조실록' 1593년 4월 13일자의 기사에는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쳐 재앙이 재궁에까지 미쳤으니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이 애통합니다.”라는 경기좌도관찰사 성영의 치계와 “이 서장을 보니 몹시 망극하다. 속히 해조로 하여금 의논해 조치하게 하라.”는 선조의 명이 기록돼 있다.

1625년(인조 3년)에는 정자각에 불이 나고, 그 다음해에는 능침에도 불이 났다.

성종(成宗) 이야기

성종(1457~ 1494)은 추존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의 둘째 아들로 1457년(세조 3년)에 경복궁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 의경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할아버지인 세조가 잠시 궁중에서 키웠는데, 성품이 돈후하고 서예와 서화에도 능해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1461년(세조 7년)에 자산군에 봉해졌고, 숙부 예종이 1469년(예종 1년)에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의 명으로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정희왕후 윤씨의 수렴청정을 7년 동안 받았으며, 1476년(성종 7년)에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성종은 법령을 정리해 세조대에 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을 1485년(성종 16년)에 반포했고, 1492년(성종 23년)에는 '대전속록'을 완성해 유교적 통치의 전거가 되는 법제를 완비했다.

세조 측근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 사림세력을 등용해 훈신과 사림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키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 후 1494년(성종 25년)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민심 살피러 궁궐 밖으로 변복 미행 자주나가

성종은 백성들이 사는 것을 둘러보기 위해 미행(임금이 변복을 하고 궁궐 밖에 나가 민정을 살피는 것)을 자주 했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성종이 궐 밖을 다니며 겪은 일화들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왔다.

어느 해 겨울, 성종이 여느 때처럼 미행을 나갔을 때, 남산골 초라한 오막살이에서 글 읽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담은 무너지고 서까래가 썩어가는 누추한 곳이었는데, '춘추좌전'을 읽는 소리가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성종은 등불이 꺼져 불을 얻고자 한다는 핑계를 들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글을 읽던 선비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지은 문집을 읽어본 성종은 선비의 해박함과 그 문집의 명문에 깜짝 놀랐다.

훌륭한 학식을 갖춘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어려운 살림을 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성종은 선비 몰래 쌀과 고기를 그 집에 보내고, 예정에 없던 과거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 선비의 문집에서 본 글을 과제로 내걸고, 선비가 과거에 응시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선비의 문집에 있던 글이 제출되자, 성종은 더 살펴볼 것도 없이 그 글을 장원급제를 시켰다.

그런데 글을 지은 사람의 이름이 그 선비의 이름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여겨 장원급제자를 들이라 하였는데, 주인공은 선비가 아닌 새파란 젊은이였다.

자초지종을 묻자 젊은이는 “그 분은 저의 스승이었는데, 이번 과거를 꼭 보시려고 했으나, 며칠 전 굶주리다가 갑자기 먹은 고기 때문에 크게 병이 나서 돌아가셨다.”고 답하였다. 성종은 안타까움에 크게 탄식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정현왕후(貞顯王后) 이야기

선릉 정현왕후 능침

성종의 왕비 정현왕후 윤씨(1462~1530)는 본관이 파평인 영원부원군 윤호와 연안부부인 전씨의 딸로 1462년(세조 8년)에 신창 관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윤창년(尹昌年)이다.

1473년(성종 4년)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 종2품)에 봉해지고, 1479년(성종 10년)에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되자 이듬해인 1480년(성종 11년)에 왕비로 책봉됐다.

당시 정계에 떠오르던 아버지 윤호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외척 한명회를 견제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졌다.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최후를 바라본 정현왕후는 성종에게 매우 관대했다. 이에 성종은 ”다행히 어진 왕비를 찾아 마음이 평안하다.”고 흡족해 했다.

연산군 즉위 후 자순왕대비가 됐으며, 1506년(중종 1년)에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의 즉위를 허락하기도 했다. 그 후 1530년(중종 25년)에 경복궁 동궁 정침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 친 아들처럼 키워, 후일 연산군도 예우 다해 모셔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된 이후 중전의 자리에 오른 정현왕후는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키웠고, 연산군 역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다고 한다.

연산군은 즉위 후 성종의 능지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폐비 윤씨의 아버지 윤기견(尹起견)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고는, 자신이 친어머니로 알고 있던 정현왕후 윤씨의 아버지 윤호(尹壕)를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질 만큼 폐비 윤씨의 존재를 몰랐다.

이 질문에 승지들이 비로소 윤기견과 폐비 윤씨에 관한 일을 아뢰었고, 연산군은 그때서야 자신의 친어머니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

'연산군일기' 1495년(연산군 1년) 3월 16일자 기사에는 “왕이 비로소 윤씨(폐비 윤씨)가 폐위되어 죽은 줄을 알고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연산군일기' 1504년(연산군 10년) 3월 20일자 기사에는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죽음에 연루된 귀인 정씨와 엄씨를 잔인하게 때려 죽인 뒤 장검을 들고 정현왕후의 처소로 들어가 “어서 밖으로 나오라”며 행패를 부린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해치지 않았고, 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가 폐비 윤씨의 복위를 앞장서 반대했음에도 정현왕후에 대한 예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제9대 성종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 순릉(順陵)

능의 구성

순릉 공혜왕후 능침 곡장

순릉은 조선 9대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 한씨의 단릉이다.

파주 삼릉 내에 있는 3기의 능 중에서 유일하게 왕릉의 형식으로 조성한 능인데, 공혜왕후는 중전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 수라간,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돼 있다.

비각에는 한 기의 능표석이 있는데 ‘조선국 공혜왕후 순릉(朝鮮國 恭惠王后 順陵)’이라고 새겨져 있다.
능침은 병풍석은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2쌍씩 배치했다.

장명등은 공릉의 장명등과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어 세부적인 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조선 전기 장명등의 전반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점에서 비슷하다.

무석인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양손으로는 칼을 잡고 무관의 갑옷을 입고 목을 움츠린 모습이다. 갑옷의 선은 뚜렷하지만 얼굴은 다소 경색된 표정을 하고 있다.

능의 역사

순릉 공혜왕후 석물

1475년(성종 5년)에 공혜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장순왕후의 공릉이 있는 파주에 능을 조성했다.

공혜왕후(恭惠王后) 이야기

공혜왕후 한씨(1456~1474)는 본관이 청주인 상당부원군 한명회와 황려부부인 민씨의 넷째 딸로 1456년(세조 2년)에 연화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예종의 첫 번째 왕비 장순왕후와는 자매지간이 된다.

1467년(세조 13년)에 자산군(성종)과 가례를 올려 천안군부인에 봉해졌으며, 1469년에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됐다. 성종 사이에서는 소생을 낳지 못했으며, 1474년(성종 5년)에 창덕궁 구현전에서 19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죽고 사는 데는 천명이 있으니, 세 왕후를 모시고 끝내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순릉의 지석에는 공혜왕후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가 전한다. 왕후는 나면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였으며, 조금 커서는 온화하고 의순하며 숙경했다.

순릉 공혜왕후 혼유석 고석

1467년 세조가 성종을 자산군으로 봉하고 배필을 가릴 때 뜻에 맞는 사람이 없었는데, 왕후가 덕 있는 용모를 지녔음을 알고 불러 보고서 혼인을 정했다.

왕후를 들여와 뵈이니 언동이 예에 맞으므로 세조와 대왕대비가 매우 사랑했다.

그 때 왕후는 나이가 어렸으나 노성한 사람처럼 엄전했으며, 늘 가까이 모시되 경근하기가 갈수록 지극하니 이 때문에 권위가 날로 더해갔다고 전해진다. 순릉 공혜왕후 능침 혼유석 아래 고석에는 도깨비(귀면)가 새겨져 있다(위 사진). <자료,사진출처=문화재청,조선왕릉관리소,공공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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