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을 만나다' 신덕고황후 "정릉(貞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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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을 만나다' 신덕고황후 "정릉(貞陵)"
  • 김종혁 기자
  • 승인 2016.07.12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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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대 왕비 정릉 능침   이하사진=문화재청

 -능의 구성-

정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두 번째 왕비 신덕고황후 강씨의 능이다. 단릉의 형식으로, 능침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를 배치했다.

정릉 장명등,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만이 조성당시의 것이며 나머지 석물은 현종 대에 다시 조성했다. 장명등은 고려시대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시대 능역의 가장 오래된 석물인 동시에 예술적 가치가 높다.

능침아래에는 홍살문,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이 있고, 일반 조선왕릉과 달리 직선축이 아닌 자연 지형에 맞추어 절선축으로 조성되었다. 진입공간에 금천교의 모습은 우리나라 자연형 석교의 조형기술을 볼 수 있으며 재실 양 옆으로 서 있는 느티나무의 보호수도 살펴 볼만한 가치 있는 역사경관이다.

-능의 역사-

1396년(태조 5년)에 신덕고황후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취현방(현 영국대사관 근처)에 정릉을 조성하고,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조성했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한 후 태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정릉은 푸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정릉 정자각

태종은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집을 짓는 것을 허락했고, 정릉이 도성 안에 있다는 이유로 사을한산(현 정릉)으로 천장했다.

이 후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과 난간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했으며, 그 밖에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쓰도록 했다.

민묘나 다름없었던 정릉은 260여 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년)에 왕릉의 상설을 갖추게 됐다.

-신덕고황후 이야기-

신덕고황후 강씨는 본관이 곡산인 상산부원군 강윤성과 진산부부인 강씨의 딸로 태어났다. 강씨 집안은 고려의 권문세가로서 이성계의 권력 형성과 조선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전해진다.

향처(鄕妻, 고향에서 결혼한 부인)와 경처(京妻, 서울에서 결혼한 부인)를 두는 고려의 풍습에 따라 신덕고황후는 태조의 경처가 돼 무안대군 방번과  의안대군 방석 그리고  경순공주등 2남1녀를 낳았다.

 

정릉전경

태조의 향처 한씨가 이미 조선 개국 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조선이 건국되면서 신덕고황후가 조선 최초로 왕비 즉 현비로 책봉됐다.

태조 재위 시절 자신의 둘째아들 의안대군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등 지지기반을 닦았으나 이는 후에 왕자의 난을 일으키는 씨앗이 됐다.

1396년(태조 5년)에 이득분의 사저에서 세상을 떠났고, 1899년(광무 3년)에 신덕고황후로 제 1대 태조와 함께 추존됐다.


태조는 신덕고황후를 극진히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우게 된 계기에 대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의 어느 날,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매우 말라 우물을 찾았다고 한다.

마침 우물가에 있던 아리따운 그 고을의 처자에게 물을 청했는데,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을 띄워 그에게 건네주었다.

태조가 버들잎을 띄운 이유를 묻자 처자는 “갈증이 심하여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그리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대답을 들은 태조는 그녀의 갸륵한 마음 씀씀이에 반하여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됐다.

조선 첫 왕비가 묻혀있는 정릉도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됐다.


좌우명 : 아무리 얇게 저며도 양면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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