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想] ‘수고하세요’는 저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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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想] ‘수고하세요’는 저주인가
  • 김경탁 기자
  • 승인 2016.07.03 11:5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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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탁 편집부장

[매일일보] 아주 오래전부터 회자되는 우스갯소리 하나.

버스기사와 술 취한 승객 사이에 시비가 붙어 실랑이를 벌이던 중 술 취한 승객이 “평생 버스나 몰고 살아라”라고 소리쳤다. 이에 버스기사가 “너는 평생 버스나 타고 다녀라”고 응수했다….

IMF 국가부도사태 이후 정리해고 일상화로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진데다 박근혜정부가 지난 1월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 지침을 발표하면서 사용자의 판단에 근거한 해고가 자유로워진 요즘 보면 “평생 버스나 몰고 살라”는 이야기는 축복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저 우스갯소리가 만들어졌을 당시는 물론 지금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아도 대한민국에서 ‘평생 노동’은 저주임에 틀림없다. 스스로를 ‘노동자 계급’으로 인식하고 노동자 전체의 권익을 향상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종 혹은 빨갱이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노동’이 얼마나 저주스러운 말인가 하면 노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노동자’라는 단어도 편하게 사용하지 못해 ‘근로자’라는 단어를 만들어서 쓰고 있고, 세계 공통인 ‘노동자의 날’을 ‘근로자의 날’로 바꿔서 부를 정도이다.

같은 맥락에서 저주 취급을 받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일을 하느라고 힘을 들이고 애를 쓰다”는 뜻의 ‘수고’이다.

일상에서 '감사합니다,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합니다'라는 의미를 담아 전하는 표현인 ‘수고하셨습니다’와 ‘수고하세요’에 대해 국립국어원은 “한자어 수고(受苦)의 본래 의미가 ‘고통을 받음’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으므로 윗사람에게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잘라 말한다.

“윗사람에게는 써서는 안 되지만, 동년배나 아래 직원에게는 쓸 수 있는 표현”이라고 덧붙인 국립국어원의 ‘수고’에 대한 공식 입장을 보면서 느끼는 솔직한 감상은 ‘노동’이 하층계급(아랫것들?)의 전유물이라는 속마음을 드러낸 ‘자칭 양반들’의 시대착오적 헛소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수고하세요’라는 말을 쓸 때 상대방에게 ‘당신은 나보다 아랫사람이다’라는 인식을 담아서 하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될까,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서 그 말을 쓰는 사람이 있기는 있을까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해석에 대해 ‘어원이 그렇다’는 말은 핑계일 수밖에 없는 게, 우리 국어에서 어원과 거리가 먼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는 셀 수 없이 많고 그 중에는 어원과 정반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점을 국어연구자들이 모를리 없지 않은가.

일상의 수고로움을 대신해주는 그래서 ‘수고하셨다’거나 ‘수고해달라’는 말을 계속해서 전하게 되는 서비스 노동자들을 ‘아랫사람’ 취급해도 무방하다는 뜻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고, 나아가 국립국어원이 원하는 것이 ‘수고’라는 단어의 퇴출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언어는 영혼의 현신’이라고 하는데, 이런 말과 인식이 서비스 노동자에 대한 갑질을 정당화하고, 나아가 노동 자체를 천시하는 문화를 고착화시켜 국가 전체의 학력 인플레와 노동 수급 불균형을 악화시키는 근원으로 작용하는 것 아닐까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서두에서 언급한 우스갯소리는 말싸움에 밀린 만취 승객이 “차 세워. 나 내릴꺼야”라고 하자 버스기사가 “이게 택시냐? 내리려면 벨 눌러”라고 맞받아쳤다는 이야기로 끝이 난다.

그렇다. 제 아무리 재벌그룹 회장이라 해도 노선버스에서 내리려면 하차벨을 눌러야 한다. ‘서비스’라는 '수고'를 매개로 만난 노동자와 소비자 사이에도 원칙과 예의가 지켜져야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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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던 사람 2017-12-25 20:37:59
정말 잘 읽었습니다.
지나치기 너무 도움이 많이 되는 글이라서 댓글 남기고 갑니다
보석같은 글들 많이 써주세요 ^^

정론직필 2016-07-04 14:03:20
공감됩니다..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