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규장각" 기록으로 살펴본 조선왕실 결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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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 기록으로 살펴본 조선왕실 결혼 문화
  • 김종혁 기자
  • 승인 2016.07.01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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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혼례식, 가례는 어떻게 치뤄졌을까? 청혼에서 결혼 피로연에 이르는 왕실의 결혼절차를 살펴본다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정비였던 정성왕후와 사별했던 영조임금이 3년상을 마친 1759년, 15세된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를 계비로 맞이하는 혼례식을 기록한 의궤. 영조임금이 정순왕후를 데리고 궁으로 돌아가는 '친영반차도'에는 379필의 말과 1299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가례(嘉禮)는 원래 왕실의 큰 경사를 뜻하는 말로서, 왕실의 혼인이나 책봉(冊封), 존호(尊號), 각종 진연(進宴), 진찬(進饌) 등의 의식 예법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가례도감의궤’로 제목이 붙여진 책 모두가 왕이나 왕세자의 결혼식을 정리한 기록임을 볼 때, ‘가례도감의궤’에 나타난 가례는 곧 왕실의 혼인 의식, 그 중에서도 특히 왕이나 왕세자의 혼인을 뜻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위의 사진은 정비인 정성왕후와 사별한 영조가 3년 상을 마친 1759년에 15세 된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를 계비로 맞이하는 혼례식을 기록한 의궤다. 영조가 정순왕후를 데리고 궁으로 가는 50면에 달하는 <친영반차도>가 실려 있는데 379필의 말과 1299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왕실의 혼례식, 가례-

왕실의 혼인 과정 중에서 첫 번째로 시행해야 하는 것이 규수를 선택하는 간택(揀擇)이었다. 국가는 왕실의 결혼에 앞서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결혼 적령기에 있는 전국의 모든 처녀를 대상으로 ‘처녀 단자’를 올리게 했다. 그러나 실제 처녀 단자를 올리는 응모자는 25~30명 정도에 불과했다. 실제 규수가 사전에 내정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경제적, 정치적 부담 등이 따랐기 때문에 기피하는 경향이 컸다.

왕실에서는 왕비를 간택할 때 세 차례의 심사 과정을 거치는데 대개 1차는 6~10명, 2차에 3명, 3차에서 최종 1명을 선택하였다. 삼간택에 뽑힌 규수는 비빈(妃嬪)의 대례복(大禮服)으로 왕비의 위용을 갖추고 별궁에 모셔졌다. 별궁은 예비 왕비가 미리 왕실의 법도를 배우는 공간이었으며 국왕이 친히 사가(私家)에 가는 부담을 덜어 주었다. 간택을 받아 별궁에서 왕실의 법도를 배운 규수는 왕실 혼인 의식의 기본이 되는 육례(六禮)에 따라 국왕과 혼례식을 치렀다.

-혼례식의 절차-

납채례(納采禮): 신부의 집에 청혼서 보내기.간택된 규수에게 혼인의 징표인 교명문(敎命文)과 기러기를 보내고 신부가 이를 받아 들이는 의식
납징례(納徵禮): 혼인 성립의 징표로 예물(폐물)을 보내는 의식
고기례(告期禮): 혼인 날짜를 알리는 의식
책비례(冊妃禮): 왕비 또는 세자빈을 책봉하는 의식으로 별궁에서 행해졌다.
친영례(親迎禮): 신부를 맞이해 오는 의식. 조선 후기에는 왕이 직접 별궁에 있는 왕비를 맞이 하러 갔다.
동뢰연(同牢宴): 혼인 후의 궁중 잔치. 신부를 대궐에 모셔와 함께 절하고 술을 주고 받는 의식이다

                      동뢰연도 사진 = 국립 중앙박물관 제공

 동뢰연도(同牢宴圖)에는 왕과 대궐로 들어온 왕비가 서로 절한 뒤 술과 음식을 나누는 동뢰연의 기물 배치도가 그려져 있다.

-왕실의 즉위식, 책봉(冊封)-

책봉은 왕세자, 왕세손, 왕세제 및 왕비와 세자빈을 임명하는 의식으로 책례(冊禮)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국왕의 즉위는 대부분 선왕이 사망하여 장례가 진행되는 도중에 행해졌기 때문에 별도의 즉위식이나 책봉 의식이 없었다.

왕이 승하하면, 그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으므로 대개 닷새 후에 빈전(殯殿)이 있는 궁궐의 정전(正殿) 정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세자가 왕의 지위에 오른다.

그러나 세자빈을 왕비로 책봉하는 것은 보통 선왕의 3년상을 마친 후에 행하였다.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 왕세손, 왕세손비를 정하는 일은 경사스러운 분위기로 치르는 국가의 중대사였다.

왕세자 책봉식은 장차 왕위를 계승하게 될 후계자를 결정하는 행사로서 궁궐의 정전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조선시대 왕위 계승에 있어서 부자 상속이 아닐 경우도 꽤 있었는데 형제 간일 때에는 후계자를 왕세제(王世弟)라고 했다.

경종의 이복동생인 영조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러한 의례를 행할 때 왕실에서 제작한 어보(御寶), 어책(御冊), 교명(敎命) 등은 왕실의 권위와 존엄을 드러내는 상징물로 이것은 나중에 신위와 함께 종묘에 모셔 보관되었다.

조선시대 국왕은 왕비를 책봉할 때에는 교명과 책보(冊寶)를 내리고 세자 이하를 책봉할 때는 교명과 책인(冊印)을 내렸다.

교명은 임명하는 지위의 존귀함을 강조하고 책임을 다할 것을 훈유하는 글이다. 책보, 책인은 책문(冊文)과 인장인 보(寶)와 인(印)을 의미한다.

책문(冊文)은 일종의 임명장으로서 책봉받는 이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책문과 보인은 그 지위에 따라 사용한 재료가 다르다.

          헌종이 대왕대비 순원왕후에게 올린 옥보도설(옥도장의 그림과 설명)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왕과 왕비는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왕세자와 왕세자빈은 죽책(竹冊)과 금이나 은, 옥으로 만든 인(印)을 사용했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부터 황제와 황후는 금책과 금보를 따로 만들어 사용했다.

 공덕을 기리며 올리는 존호(尊號)는 대개 왕과 왕비를 각각 상왕(上王)이나 대비(大妃)로 존숭하거나, 기념이 될만한 날에 경사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올렸다. 여러 차례에 걸쳐 올리는 경우도 많으며, 대개 생전에 올리지만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사후에도 많이 올렸다.

이와 달리 시호(諡號)는 죽은 이에게만 올리는 호칭으로 시호를 생전에 올리는 경우는 없다. 존호를 올릴 때 왕과 왕비가 살아 있을 때에는 옥보(玉寶)와 옥책(玉冊)을 함께 올리고, 승하 후에는 금보와 옥책을 올렸다. 그러나 이 원칙이 엄격히 지켜지지는 않았다.

 

 


좌우명 : 아무리 얇게 저며도 양면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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