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착 취재-노숙자들의 절규 "아내와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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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 취재-노숙자들의 절규 "아내와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 이재필 기자
  • 승인 2006.05.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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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떻게 그사람을 찾아가... 아이도 보고 싶고 그 사람도 보고 싶지만...
▲ 기사 내용과 직접적 관련 없음
요즘 거리에서 노숙자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 할 수 있다. 왜 이들은 사회의 도움을 거부하며 거리를 집으로 삼고 있는 것인가. 그 누구도 이유 없는 삶은 없을 터.

본지는 이들과의 밀착 취재를 통해 이들이 노숙을 하게 된 사연을 알아봤다. 취재 결과 나타난 이들의 사연은 보통 쉽게 접할 수 없는 인생의 기막힘이었다.

부유한 집안의 자재로 태어나 노숙을 하는 사람, 시어머니와의 불화로 소박을 맞고 노숙을 하는 사람, 살인을 저지르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노숙을 하는 사람 등. 이들의 인생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길바닥을 집으로 삼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향해 손을 벌리는 이들의 모습.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노숙자가 된 데는 어떤 계기가 있었다.

기차역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심심치 않게 노숙자들을 발견 할 수 가 있다. 항상 술에 취해 사회의 도움을 거부하며 거리를 집으로 삼은 사람들. 이들은 왜 노숙을 하고 있는 것일까.

지난 8일 언론을 통해 소개된 이 모씨의 사연은 노숙자들의 한 많은 인생을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이 씨는 1972년 5월 남편 박 모씨와 결혼한 후 강원도 춘천에서 살림을 시작했지만 남편 박 씨가 다른 여자를 집으로 데려왔고 바로 쫓겨났다. 이후 이 씨는 강원도, 서울, 전남, 광주 등 35년간 전국을 떠돌며 노숙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그 누구나 이유 없는 삶은 없을 터. 본지 기자는 노숙자들과의 밀착 취재를 통해 그들의 지난 과거를 한번 알아봤다.

가족과의 불화 그리고 노숙

한 많은 이들의 인생. 그 누구보다 아껴줘야 할 가족이 이들을 노숙자로 만든 기막힌 사연을 기자는 취재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서울역에서 16년 째 노숙을 하고 있는 박 모씨. 박 씨는 한때 충청도에서 잘나가는 지역 유지의 아들이었다. 이렇게 노숙자가 될 팔자가 아니었던 박 씨는 형과의 불화로 노숙자가 됐다.

박 씨는 충청도의 한 부유층 자재로 태어났다. 학교도 다니며 그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이 지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붉어진 형과의 유산 상속 마찰은 그를 노숙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박 씨의 형은 부모님이 남겨 놓은 많은 유산을 전부 가로채기 위해 박 씨를 속였다. 당시 결혼 전이었던 박 씨는 ‘결혼 전까지 유산을 관리해주겠다’는 형의 말에 유산 전부를 형에게 넘겨줬다.

이후 시간이 흘러 박 씨는 결혼을 했고 유산 절반을 요구했지만 박 씨의 형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 박 씨는 여러 차례 형에게 유산을 나눠 줄 것을 요구했지만 이미 유산 전부가 형의 이름으로 되어 있던 터라 어쩌지 못했다. 오히려 키워준 은혜를 모른다며 박 씨의 형은 박 씨를 집에서 쫓아냈다.

이후 박 씨의 가난한 삶이 시작되었다. 공사판부터 시장 잡일까지 박 씨는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허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박 씨의 아내는 집을 나가버렸다.

아우가 이런 상황이 되었는데도 비정한 형은 동생 박 씨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후 삶에 회의를 느낀 박 씨는 전국을 떠돌며 노숙생활을 하고 있다.

78년도에 시댁에서 소박을 맞고 노숙을 시작한 김 모 여인 역시 한스런 인생은 매한 가지였다.

김 여인은 77년도에 충청도에서 강원도로 시집을 왔었다. 당시 남편과의 사이도 굉장히 좋았었다. 하지만 그의 시어머니는 김 여인이 달갑지 않았다. 김 여인의 시어머니는 김 여인이 집에 들어온 이후 몸이 계속 해서 아프다며 김 씨를 닦달했다. 결국 이 시어머니는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무당은 굿판을 벌였고 굿을 끝낸 후 ‘(시어머니)당신의 몸이 아픈 이유는 집안에 쥐와 고양이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쥐는 당신 이고 고양이는 당신 며느리다’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했다.

이에 시어머니는 무당의 말을 고스란히 믿고 김 여인을 바로 집밖으로 내쫓았다. 남편이 어떻게 말릴 틈도 없었다.

이후 집을 쫓겨난 김 여인은 친정을 찾아 갔지만 변변치 않은 살림의 친정은 출가외인이라며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그 때부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전전긍긍하던 김 여인은 지금에 이르렀다.

사회에 대한 속죄 그리고 노숙

스스로를 죄인이라 칭하며 노숙의 길을 자진해서 걷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피해자와 같은 하늘아래 떳떳이 살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고 있는 이 모씨는 전직 조직폭력배 행동 대장 출신이다. 이 씨는 광주에서 잘나가는 조직 폭력배였다.

당시 거침없는 행동과 아량으로 밑에 사람에게는 존경과 위에 사람에게는 총애를 받던 이 씨. 이 씨의 인생은 조직에서의 살인 명령을 하달 받음으로서 꼬이기 시작했다.

이 씨는 조직으로부터 대립 조직 임원 2명을 살해할 것을 명령 받았다. 이에 이 씨는 조직의 명령에 따라 2명을 살해했고 16년간의 감옥 생활을 하게 됐다. 감옥에서 그는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쳤다.

이 씨는 “내가 빵(감옥)에 있을 때 반성을 참 많이 했어. 살인은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피해자의 가족을 생각하면 지금도 어찌할지를 모르겠어”라고 전하며 “그 때 내가 출소하기 2달인가 남겨놓고 같이 있던 재소자가 나에게 물어보더라. ‘나가면 뭐하고 살거냐’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 ‘난 사람도 죽인 죄 많은 사람이야 나가면 거지로 지내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겠어’라고 그리고 출소 후 바로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어.”라고 말했다.

이어 “형님들이나 동생들이 가끔 서울역을 지나가다가 나를 보고는 왜 이러고 사냐고 물어봐. 그래도 뭐 어떡해. 내가 행한 행동에 책임을 져야지. 동생들이나 형님들이 뒤를 봐준다고 해도 난 다 거부 했어”라고 밝히며 지난날의 과오를 속죄하기 위해 노숙을 하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청량리에서 노숙을 하고 있는 이 모씨 역시 죄스런 마음에 속죄하는 자세로 노숙을 하고 있다.

이 씨에게는 넉넉하진 않지만 공사장에서 미장이 일을 하며 열심히 살던 때가 있었다. 당시 이 씨에게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과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다.

허나 아내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인지 이 씨는 아내를 의심했다. 아내가 자신 이외의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만 같았다. 한 번 갖기 시작한 의심은 결국 의처증으로 이어져 이 씨는 매일 같이 술에 취해 아내에게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들어가며 폭력을 행사했다.

▲ 기사 내용과 직접적 관련 없음
처음엔 아내도 이러다 말겠지 하는 생각에 참아오다 갈수록 심해지는 이 씨의 폭력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딸아이와 함께 집을 나가버렸다.

이 씨는 아내가 집을 나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아내를 찾아 나섰다. 허나 아내가 있을 만한 곳을 백방으로 수소문해봤지만 아내를 찾을 길은 없었다. 이후 직장도 그만둔 이 씨는 아내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노숙을 시작했고 지금은 청량리역에 이르게 됐다.

이 씨는 “내가 지금도 아내에게 너무 미안해 다시 찾으면 잘 해 줄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찾아도 잘 해 줄 여건조차 안돼”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 씨와 같이 청량리에서 노숙을 하는 김 모씨 역시 가족에게 미안한 생각뿐이다. 김 씨는 한 때 꽤 번듯한 카센타를 운영하는 사장님이었다.

고아로 자란 김 씨는 기술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에 어린 시절부터 자동차 정비 기술을 익혀 30대 초반에 자신의 이름으로 카센타를 마련했었다. 카센타를 마련함과 동시에 당시 교제를 하던 부인과 결혼하여 아들, 딸 하나씩 두고 행복하게 살았었다.

그러나 김 씨의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몰고 간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도박이었다. 김 씨는 친구의 권유로 도박장을 찾게 됐다. 이후 한번 두 번 출입하던 도박장이 어느새 중독이 되어 일과 가족을 모두 뒤로 한 채 도박에만 열중하게 됐다.

이에 이 씨의 부인은 이 씨가 도박에 빠진 것을 알고 말려 보려 했지만 이미 이 씨는 도박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도박으로 인해 이 씨는 갖고 있던 카센타와 집을 몽땅 날려버렸다. 그럼에도 이 씨는 본전 생각에 도박에서 손을 뺄 수 없었다.

이런 이 씨를 지켜본 이 씨의 부인은 아이들과 함께 집을 나가 친정으로 가버렸다. 결국 모든 것을 잃은 이 씨는 거리로 나앉게 됐다. 이 씨는 도저히 부인을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 씨는 “내가 어떻게 그 사람(부인)을 찾아가... 아이들도 보고 싶고 그 사람도 보고 싶지만 난 가장의 자격이 없어. 오히려 지금은 짐만 될 뿐이야”라고 말하며 가족을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자신의 입장에 조용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삶의 실패 그리고 노숙

노숙생활이 19년째라는 김 모씨. 김 씨는 전직 군인이었다. 월남전에도 참전했었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후 그는 중매로 만난 부인과 성북동에 자리를 잡고 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그는 전쟁에서 돌아온 후 사회에 적응 하지 못했다.

일용직 막노동으로 생활을 이어갔으며 그마저도 술에 취해 제때 나가지 못했다. 살림은 나날이 궁핍해졌으며 아내는 결국 집을 나가 버렸다. 그래도 김 씨는 술을 끊지 못했다. 청량리에서 만난 그의 모습은 술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알콜중독자였다.

김 씨는 “내가 술에 취하지 않으면 세상을 볼 수 가 없어. 뭐 원하는 대로 돌아가는 게 하나라도 있어야 제대로 살지.” “어차피 이번 생에는 미래가 없어. 다음 생을 기대하면서 이대로 살수 밖엽라고 전하며 생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는 듯 했다.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고 있는 박 모씨는 한 때 잘나가던 중소기업의 간부였다. 박 씨가 근무를 하던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로서 규모도 상당히 컸었다.

그러나 IMF때 자금융통이 안 돼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을 맛볼 때 이 기업 역시 도산이라는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때 실업자가 된 박 씨는 모아둔 자금과 빚으로 조그만 음식가게를 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건물 주인을 사칭한 사기꾼에 의해 몽땅 날리고 빚더미에 앉아 버렸다.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고 박 씨는 부인을 위해 이혼에 응해줬다. 이후 길거리로 나앉게 된 그는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게 됐다.

박 씨는 “난 정말 내가 노숙자가 될 줄 몰랐어. 사람 인생 참 웃겨.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겠어. 난 고급차도 몰고 좋은 술에 넓은 아파트에서 살았었어.” “하지만 인생 망하는 건 순식간이야. 그 누구도 예측 할 수가 없지”라며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임을 이야기 했다.

이재필 기자(hwonan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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