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박판석 자문위원장 “정치는 협치(協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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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박판석 자문위원장 “정치는 협치(協治)”
  • 민경미 기자
  • 승인 2015.07.01 15:3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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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정치 인생 바탕 삼아 상생의 정치 하겠다”
▲ 박판석 새누리당 중앙당 정책위원회 자문위원장.

[매일일보 민경미 기자] 박판석 새누리당 중앙당 정책위원회 자문위원장은 민주화 운동에 반평생을 다 바친 재야 정치인이다. 박판석 자문위원장은 30년 넘는 세월을 정치에 할애했다.

철들고 난 뒤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졌던 박 위원장에게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를 묻자 민주화 운동의 원로인 송창달 선생과의 인연을 풀어놨다.

“1979년 12·12사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송창달 선배 밑에서 정치 한다고 따라다니면서 정치에 입문했어. 당시 유신반대 운동에도 나섰지.”

박 위원장은 젊은 혈기와 남다른 의협심으로 민주화 운동을 하겠다고 결심, 청춘을 바쳤지만 정치 인생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서 당시 김대중 선생은 내란음모 수괴로 지목돼 계엄사에서 체포당하고 뒤이어 5.18이 발발했다. 당시 박 위원장은 43일간 헌병대에 감금당했었다고 한다. 

“주동자를 밝히라고 모진 고문을 했지만 누군가 한 명을 말하면 거미줄에 실타래 나오듯 나올 것이라고 생각해 끝까지 모른다고 했지. 43일째 되던 날 동명이인인가 보네 하면서 풀어주더라고. 그때 전기고문을 하도 당해서 지금까지 전기만 보면 무서워. 30대 초반부터 틀니도 하게됐고.”
 
박 위원장은 황우여 부총리가 당대표 시절 부대변인을 역임했다. 그 당시 온 국민을 경악케한 임병장 사건이 터졌다.

“황우여 대표에게 임병장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고 조언했지. 초등학교에 가면 왕따 교육을 시킨다고 말하니 황 대표가 ‘무슨 소리냐?’며 놀라서 물었어. 그래서 학교운영위원회를 12년 했던 경험을 말씀드렸지. 학급이 35명 기준이라 한 명씩 짝꿍이 없어서 왕따를 양성하게 됐다고 했지. 교육과정에서부터 왕따를 당하는데 이 부분을 수정하고 바로잡아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더니 짝수로 반편성을 돌렸어. 여당의 교육자문위원장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이 들지.”

14대와 16대 화순·보성 지역에서 출마를 했지만 쓰디쓴 패배를 맛보았다. 그는 14대 선거에선 공천을 받지못해 무소속으로 출마, 당시 언론에선 무소속 우세라고 점칠 정도로 당선이 유력시됐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그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당시 김대중 총재가 직접 화순에 내려와 자당 후보를 유세, 결과는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졌다.
 
오랜 세월 야당에 몸담았던 그였지만 18대 시절 여당인 새누리당으로 둥지를 옮겼다. 그 이유에 대해 묻자 “정책연대는 가능하지만 선거연대는 안 된다”면서 “가야할 길이 다른 세력과 합치다 보니 좌, 우 색깔이 없었다. 음식으로 표현하자면 꿀꿀이죽이다. 예전엔 중도보수를 외치면서 개혁을 표방했는데 중도보수가 아닌 진보개혁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이다. 정치인은 확실한 자기철학과 이념, 노선이 있어야 된다. 30년 몸 담았던 곳에서 떠났다”고 덧붙였다.

민주당 소속이었는데 어떻게 박근혜 대통령과의 인연이 됐느냐고 묻자 “2006년도 5.18 행사 때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 대통령이 내려온다고 하는데 광주의 분위기가 ‘독재자 딸이 왜 오느냐’는 분위기였다”면서 “행사에 오는 손님인데 정중하게 맞이하자고 얘기하고 의전을 했다”고 털어놨다.
 
그게 인연이 돼 2012년 당시 박근혜 후보 5.18 모임 지지선언 대표자가 됐다. 30년 동안 형님, 동생 했던 사람들을 제일 먼저 만나, 문재인 후보보다는 박근혜 후보가 안보 면에서 더 낫지 않겠느냐는 기자회견을 하게 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강원도, 경상도, 서울 등 전국에서 서명을 받아 기자회견을 해줬다.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산업화와 민주화가 공동 번영을 해야 대한민국은 통합이 된다. 어느 한쪽이 인정을 하지 않는다면 국민대통합은 헛구호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위원장은 민주당에도 몸을 담았었고, 현재는 새누리당과 인연을 맺고 있다. 여야가 정쟁으로 치닫는 요즘같은 세태에 상생의 정치를 위해선 무엇이 필요하냐고 묻자 “정치는 협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상생정치여야만 한다. 국회의원은 대한민국의 입법기관이다. 자기의 생각과 뜻이 일치하지 않아도 당론이라고 하면 따라가는데, 국민을 위해서 필요한가 아닌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국가를 먼저 생각하라. 지역구 국회의원이 아니다. 지역 현안보다는 국가와 국민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20대 총선을 준비하고 있는 박 위원장은 국회의원이 된다면 안정 속의 개혁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안정이 된 상태에서 개혁을 해야한다. 협력 속에 견제를 하고 성장 속의 분배를 해야 한다.  국가는 정의로워야 하고, 사회는 공평해야 한다”며 공정사회에 대해 일갈했다.

박 위원장은 “공정과 공평 차이를 단적인 예를 들자면 하나의 일을 놓고 2명이 일을 하는데 한 명은 부지런하고 한 명은 게을렀는데 5대 5로 나누는 게 공정이고 6대 4로 간다면 공평”이라고 설명한 뒤, “국민의 삶이 행복해질 수 있는 정치가 이뤄져야 한다. 이 사회가 공평해지면 행복해진다”고 밝혔다.

정치 인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자 독도 망언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 외무성에서 시위한 것이라고 했다.

“1992년 2월에 독도 문제로 첫 망언이 나왔지. 4월에 총선이었어. 정치인 중 일본에 항의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고. 당시 총선에 나오려고 준비하고 있었지만 선거는 포기하더라도 국민의 자존심은 누군가는 외쳐야 하지 않는냐고 결심해서 3월 1일에 일본 외무성에 들어갔어. 일본에 항의하는 플랭카드를 치고 정문을 통과했지만 경비병력에 막혀서 끌려나올 수밖에 없었지.”

당시 주일 대사관에서 힘을 써서 ‘독도는 대한민국의 고유영토이고 일본의 침략야욕에 의한 대한민국 영토주권을 사수하려고 왔다. 일제 35년 1개월 5일 동안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면서 보상하라.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을 하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낭독하고 삭발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 극우세력의 위협 속에 한국 경찰주재관의 보호 속에 무사히 귀국했는데 그때 경황이 없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못했는데 지금이라도 만나서 인사를 하고 싶다고 전했다.

“귀국한 뒤, 3월 3일부터 단식을 했지. 광화문 파출소 근처 노상에서 사과 상자 두 겹을 깔고 담요 2장에 의지한 채 단식을 들어갔는데 13일째 되던 날 비가 온거야. 저체온 증상이 오기 시작해 119에 실려가서 단식을 풀었어. 정치인으로서 가장 기억에 남아. 만일 정치를 하지않고 소시민으로 살았다면 가정을 먼저 생각했었을 것이지만 정치인으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국가를 생각할 수 있었지.”

20대 국회에서 30년 정치 인생의 경륜을 바탕으로 국가를 위해 일해보고 싶다는 박 위원장, 그의 모습에서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가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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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인 2016-12-07 15:47:15
2004년 송원대학 야구부단장하실때 야구부 회비로 정치하신분입니다 대단한분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