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이 ‘죄’인 나라의 꿈같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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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이 ‘죄’인 나라의 꿈같은 이야기
  • 김경탁 기자
  • 승인 2015.05.31 14: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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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절벽 대해부-인구절벽⑧] 인구절벽 시대, 이 땅에 살아갈 당신께 보내는 메시지
▲ 임신중절 경험자를 직접 인터뷰한 다큐멘터리 영화 ‘자, 이제 댄스타임’(연출: 조세영)의 한 장면. 한국사회에서 '능력'이 없는 사람의 출산은 한 생명을 지우는 낙태보다 훨씬 큰 죄로 인식된다.

[매일일보] 솔직하게 까놓고 말하자. 대한민국에서 출산은 ‘축복’보다 ‘죄’에 가까운 대우를 받는다. 

출산이 ‘죄’ 취급을 받는다는 말은 혼외 출산, 미성년 출산 같이 사람들이 흔히 ‘비정상적’이라고 치부하는 출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직장 여성의 출산이나 경제적 능력이 없는 혹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이른바 ‘정상’ 부부의 출산도 마찬가지이다. 

‘모성보호법’은 남의 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같은 직장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여성의 출산과 육아 과정에 일어나는 여러 불가피한 일들을 회사 혹은 동료와 상사들에게 부담을 지우는 이기적 얌체 행위로 바라본다.

이들에게 있어 ‘나한테 피해를 주는 출산’은 몰염치한 민폐 행위이다.

“요즘 여자들이 애를 너무 안 낳으려 해서 문제”라며 집단으로서의 ‘여성’ 전체를 향해 이기적이라 손가락질하면서 정작 개인으로서 자기 직장의 부하 여직원이 출산 또는 육아휴직을 받아 자기 업무에 지장을 주면 그 여직원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것이다.

물론 현행 근로기준법에 미흡하나마 ‘모성보호’를 위한 조항이 몇 가지 담겨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직장여성이 몸을 담고 있는 중소기업이나 자영업 단위의 사업장에서는 아예 그런 법 자체를 신경쓰지 않는 경우가 많고 대기업이라고 그런 법조항들이 있는 그대로 지켜지지도 않는다.

한국노총의 지난해 4~5월 설문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절대 다수가 공기업과 정부기관을 포함한 500인 이상 대규모 사업장에 근무하는 정규직이었음에도 ‘산전 진찰시간 보장’이나 ‘임신으로 인한 인사상 불이익 금지’ 등의 규정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을 정도이다.

임신과 출산조차 이런 대우를 받는 사회에서 워킹맘의 ‘육아’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굳이 구구절절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슈퍼우먼’이 될 수 없는 다수의 워킹맘들은 직장과 가정 양쪽에서 ‘죄인’이 된다.

▲ 배우자 출산휴가 제도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66.2%는 '회사 분위기상 사용하기 어려워서' 제도를 활용할 수 없다고 답했다.

아무것도 책임져주지 않는 사회…‘혁명’이 필요한 시대

출산을 죄로 바라보는 시선은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에게로 확대된다. 가난한 부부의 출산, 특히 그 아이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부부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른 무책임한 행위’라는 비난으로 쏠린다.

이런 시선의 밑바닥에는 출산과 육아, 보육, 교육이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라는 소리를 남의 나라 이야기이고, 꿈같은 소리라고 보는 생각이 깔려있다. 

출산 그리고 육아는 오롯이 개개인이 각자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고 넘어야할 장애물(라훌라)로 보는 이런 사회가 이 시대의 젊은 여성 개개인에게 “인구절벽 해소라는 대의를 위해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그만큼 이 사회가 사람이 살만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윤과 효율이 인권과 배려를 압도하는 사회이고, 한번 삐끗하면 다시 일어설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 무정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돈’과 ‘효율’이 모든 가치를 압도하고 있고, ‘공존’을 말하기에는 개개인의 ‘생존’도 쉽게 담보할 수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 행태가 그대로 온존하는 한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출산율 증가를 위해 지원금을 얼마 주고 어떤 복지혜택을 주며 어떤 유인책을 내놓겠다고 아무리 떠든다 해도 대한민국에서 출산이 ‘축복’보다 ‘죄’로 취급되는 현실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회, 이런 인식을 근본에서 바꾸는 것이 인구절벽 문제와 관련된 모든 해결책의 출발이다.

절망적인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국가 구조 전체에 혁명적 변화가 필요하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 같은 ‘새나라 새사회 운동’이 21세기 대한민국에 필요하다.

그러나 단순한 해답에 비해 해법은 요원하다.

혁명을 추동할 만한 대중의 에너지는 한참 부족해 보이고, 설령 보이지 않는 곳에 그런 역량이 잠재되어있다 한들 이를 한데 묶을 수 있는 리더십은 눈에 띄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세계 최빈국이었던 수십 년 전, 잘 키운 다음에 함께 나눠먹자던 그 ‘파이’는 어느덧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파이 중 하나가 되었지만 언제쯤 파이를 골고루 나눠먹을 수 있을지는 감감무소식이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파이가 작다”는 고성도 들리고 혹여 ‘이제는 파이를 나눠먹자’는 주장이 반대쪽에서 터져 나오면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매도와 ‘재정파탄 우려’라는 호들갑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우리나라와 비슷한 경제수준을 가진 나라들에 비해 복지수준이 턱없이 낮다’는 소심한 반박은 귓등을 스치면서 산산이 흩어질 뿐이다.

‘희망’은 없지만 ‘포기’도 안된다

이런 사회에 절망한 개인들은 이민을 꿈꾸고 그중 일부는 실제 이민을 결행한다.

그리고 주변에 이민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으면 ‘조국을 버린 유승준 같은 놈’이라는 비난을 하기보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 충분히 할 수 있는 선택’이라며 존중하고 오히려 부러워하게 된다.

 

지금까지 8회에 걸쳐 한국 사회가 ‘인구절벽’ 시대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모색해봤지만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들이 무의미한 것일 수 있다는 고백이다.

여기에서 시리즈 첫 기사의 첫 단락을 다시 가져와 본다.

“정확한 처방은 정확한 진단에서 나온다.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의 인구정책에 있어 ‘골든타임’은 이미 끝났다는 점을 인정해야한다. 그 지점에서 정확한 인식과 처방이 가능하다.”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지만, 우리가 앞으로 한국사회에서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포기’는 선택지가 될 수 없다.

당신이 ‘기성세대’이고, 이 시대 한국사회를 자신이 앞으로 계속 살아가고 늙어갈 ‘터전’이라고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자기 혼자 살아남기 위해 사다리를 걷어차기보다 넘어진 사람들의 손을 잡아야한다.

이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살아갈만하게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그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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