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평론]1894년 갑오년과 2014년 갑오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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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평론]1894년 갑오년과 2014년 갑오년
  • 장성준 객원논설위원
  • 승인 2014.07.07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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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1894년 갑오년 한반도.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분노한 농민들이 전봉준을 중심으로 2월 봉기했다. 이들은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며 세력을 확장해 5월 전주를 점령했다. 다급해진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갑신정변 이후 조선 재침탈을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은 이를 빌미로 군대를 진주시켰다. 이후 갑오개혁을 강요하는 등 내정간섭을 통해 지배권 확대를 도모하는 한편 아산만에 정박 중인 청나라 군대를 기습해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한반도가 전쟁의 참화에 휩싸인 것은 불문가지다.

그해 10월 일본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을 처절히 패퇴시켰다. 결국 청일전쟁은 이듬해인 을미년(1895년)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일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한 후 시신까지 훼손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10년 뒤 러일전쟁까지 승리로 이끈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했으며, 5년 후에는 조선을 강제로 식민지로 삼고 말았다.

2014년 갑오년 동북아. 일본이 ‘전쟁할 권리’를 갖겠다고 나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험악해지고 있다. 고노(河野) 담화를 훼손한 일본 아베 정권이 집단적 자위권이 일본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본은 ‘집단적 자위권은 보유하나 헌법의 제약으로 행사할 수 없다’는 전수방위(傳守防衛) 원칙을 고수해 왔다. 이러한 원칙이 무너짐에 따라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동북아의 힘의 균형에 균열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사실 일본의 우경화 행보는 미국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시아 중시 전략으로 회귀한 미국은 재정 부담을 일본이 덜어주길 기대해 왔다. 특히 중국의 급부상을 견제하기 위해선 미·일동맹이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선 일본의 군비 증가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일본의 군비 강화를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과거 일본의 우경화가 동북아를 넘어 세계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었는지를 처절하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러일전쟁 직후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는 회담을 갖고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상호 승인했다. 태프트·가쓰라 밀약이다. 망국을 막기 위한 대한제국의 필사적인 외교적 노력은 이 밀약으로 물거품이 되었고, 일본은 서구열강의 별다른 이의가 없는 가운데 한반도를 집어삼킬 수 있었다. 그 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미국을 비롯한 수많은 국가에 피해를 끼쳤고, 결국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은 지금도 이러한 과거사에 대해 반성은커녕 철저한 왜곡과 폄훼로 일관하고 있다. 이웃 국가 간 신뢰를 깨는 파렴치한 행동이다. 한·미·일 공조를 바라는 미국에게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미국도 이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일본은 전범국이다. 일본 각료들이 전범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다고 해서 전쟁범죄자가 평화애호가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재무장 여부를 떠나 이는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 없는 무력이 어떻게 변해갈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110년 전 미국의 묵인은 30년도 안 돼 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화의 밑그림이, 우리에게는 35년간 피어린 고난의 씨앗이 되었다. 오늘날 일본의 재무장이 몇십 년 후 어떠한 모습으로 전개될지 우려의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인류 보편의 가치를 외면하는 이웃을 곁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은 참으로 고달픈 일이다. 두 갑자(甲子) 전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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